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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외 교회 이슈

아름다움을 잃어가는 교회

2022년 3월 27일, 오스트리아 빈의 도미니코회 성당 제대 축성식.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에 의해 축성된 이 제대는 성당 내부의 품위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초라한 디자인 탓에 일부 천주교 신자들에 의해 “이케아 제대”(Ikea Altar)라는 멸칭으로 불린다. (출처 : Corpus Christi Watershed)

오늘날 두 가지 종류의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하나는 직관적으로 봤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충분히 아름답다고 느낄만한 아름다움이다. 다른 하나는 누가 봐도 아름다운 구석이 전혀 없음에도 상황과 맥락이 “아름답다고 말하라” 하고 강요하는 탓에 아름답다고 말하게 되는 “아름다움”이다.

성당 건축과 성미술에 있어서도 이 아름다움과 “아름다움”이 공존하고 있다. 전자의 아름다움이 어떤 것인지는 그저 구글에 “아름다운 유럽 교회”나 “전국 예쁜 성당” 같은 키워드를 검색해보기만 하더라도 대체로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알 수 있다. 로마네스크, 바로크, 고딕 등 유서 깊은 고전적 건축 양식이 반영된 성당들을 두고 사람들은 아름답다 말한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도상학의 상징주의와 화풍이 드러나는 성미술을 사람들은 명화로 손꼽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해가며 세계 곳곳의 성당과 성미술에서 드러나는 이러한 아름다움들을 관상하러 떠나곤 한다.

반면 후자의 “아름다움”은 어떤 것일까? 꼭대기의 십자가만 떼면 세속 사회의 다른 건물들과 전혀 구분할 수 없는 신축 성당들, 현대 미술의 퇴폐적이고 공허한 유행을 그대로 답습한 탓에 직관적인 미학도, 그리스도교 도상학의 상징주의도 잃어버린 창의적이기만 한 그림들이 20세기 중후반부터 가톨릭교회 안에 대거 출현하기 시작했다. 뚜렷한 의미도, 척 보기에 느껴지는 고상함이나 엄숙함도 없지만, 성당이라는, 성미술이라는 이유 때문에, 또는 그런 것들을 설계하고 제작한 이들의 대의와 노력, 때때로 그들이 깊은 묵상의 시간을 가졌다 하기 때문에, 그 누구의 비판도 허용되지 않고 그저 아름답다고 칭찬해야만 하는 “아름다움”이 오늘날 국내외의 보편 교회 안에 만연하다.

 

 

노트르담 대성당 복원을 둘러싼 논란

 

물론 (국내에는 없다시피 하지만) 해외에는 기존의 가톨릭교회가 향유해오던 아름다움을 옹호하면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 “아름다움”을 비판하는 신자들이 상당히 많다. 화재로 붕괴된 노트르담 대성당의 복원을 둘러싼 최근의 논란은, 이런 신자들의 생각이 가시화된 가장 가까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한창 복원 작업이 진행되던 2023년 말,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노트르담 대성당 내의 스테인드 글라스를 현대적인 디자인의 작품들로 교체하겠다는 계획을 내세웠는데, 이에 수많은 대중들이 반발하여 무산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계획은 다른 누구도 아닌 파리 대교구 로랑 울리히 대주교(Abp. Laurent Ulrich)의 아이디어에 기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대성당에 현대적인 디자인을 도입하겠다는 의지는 꺾이지 못했다. 파리 대교구는 프랑스의 예술가와 디자이너에게 의뢰하여, 대성당 복원이 끝난 후 작년 12월 치뤄진 재개관 기념식 때 기어코 “아름다움”을 반영하는 제의제대, 제구들을 선보였다.

노트르담 재개관 기념식 사진. 로랑 울리히 주교를 비롯한 성직자들은 꼭 색종이를 오려 붙인 듯한 제의를 입고 등장했다. (출처 : AP)
복원된 노트르담 대성당에 새롭게 등장한 독서대, 주례석, 제대 등 교회 기물들(왼쪽). 해당 기물들을 디자인한 기욤 바르데(Guillaume Bardet)의 평범한 가구 디자인(오른쪽). 거룩한 일을 위해 사용될 물건과 일상에서 사용하는 물건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출처 : Civilek info, Couvent de la Tourette)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새롭게 사용될 제구들. 역시나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는 식기들과 차이가 없다. (출처 : New Liturgical Movement)

 

성미술에 깊은 관심이 있는 많은 신자들이 파리 대교구가 선보인 디자인에 반발했지만, 어쩌면 그 신자들이 너무 꼬장꼬장하고 고리타분한 식견 좁은 꼰대들이라서 그렇게 외골수적으로 반응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대중들의 반응은 어떠했나? 이러한 제의와 제대, 제구들을 통해 가톨릭교회 성미술의 가치들 곧 고상함, 엄숙함, 거룩함, 그 독특한 품위와 엄위를 관상할 수 있었을까?

 

유튜브에 업로드된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 기념식 영상의 댓글들을 보면, 사람들은 대성당 자체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예찬하나 대교구가 새롭게 선보인 디자인들에 대해서 아름답다고 하는 사람들은 찾아보기 어렵다. 대신 많은 사람들은 주교의 차림을 두고서 RPG 게임에 나올법한 마법사 캐릭터에 빗대며 농담하기 바빴다. “주교가 입고 있는 건 마이크로소프트 배너인가?” 하는 댓글도 달렸다.

노트르담 대성당 재개관 기념식 유튜브 영상에 달린 댓글들. (출처 : EWTN 유튜브.)

 

본디 가톨릭교회가 지녀왔던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확인해보고 상기한 “아름다움”과 대조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2017년 동일한 대성당 안에서 1962년판 미사 경본에 따라 거행된 미사 가운데 사용된 고전적인 디자인의 제의, 제구들을 확인해보면 그 차이가 얼마나 큰지를 누구든지 알 수 있다.

 

물론 사람마다 취향은 다양할 수 있다. 누군가는 ‘나는 고전적인 디자인보다는 현대적인 디자인이 더 마음에 드는데?’ 하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두 디자인이 반영하는 정서와 가치가 서로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개인의 취향을 떠나 누구나 동의할만한 사실이다. 전자는 고상함, 엄숙함, 거룩함(거룩함이라는 표현이 거슬린다면, 종교성이라는 단어로 대체해도 좋겠다), 화려함, 품위와 엄위, 전통적이고 미학적인 가치 등을 반영한다.

 

후자는 무엇을 반영하는가? …… 솔직히 잘 모르겠다.

여담으로, 고전적인 성미술의 상징주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교 도상학에 대한 약간의 지식만 있으면 된다. 예컨대 맨 왼쪽 위 이미지에서 사제의 제의 뒷면에 그려진 ‘어린양’은 인류를 위한 희생 제물이 되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데(요한 1,29 참조), 가톨릭교회의 성미술에서 빈번히 사용되는 상징이다. 즉 하나를 알기만 해도 수많은 성미술 작품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오른쪽 이미지들과 같이 오늘날 수많은 현대적 디자인들의 상징과 의미를 이해하려면, 각각 작품을 디자인한 개별 디자이너들의 설명을 하나 하나 확인해봐야 한다. (출처 : 유튜브 채널 ‘Daniel CASTILLO’, Church Times, Catholic Courier, Catholic Standard)

 

노트르담 대성당의 사례가 보여주는 바 가톨릭교회가 본래 지니고 있던 아름다움이 이러한 급조된 “아름다움”으로 대체되는 현상은 오늘날까지도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자처하지만 전혀 아름답지 않은 그런 성당들을 두고 ‘어글리 처치’(ugly church)라 칭한다. 그리고 그런 성당들 안에는 온갖 흉한(ugly) 작품들이 성미술을 자처하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공공 시설이나 박물관처럼 보이는 이 건물들은 놀랍게도 모두 세계 각지의 가톨릭 성당들이다. (출처 : vienna.info, FAMVIN, Wikipedia, ArchDaily)
전주교구 권상연성당 십자고상(왼쪽)과 아우구스띠노수도회 연천수도원 십자고상(오른쪽). (출처 : 가톨릭신문, 그림건축사사무소)
명동대성당의 흉측한 예수상들. (출처 : 서울경제, 오마이뉴스)

 

 

토착화인가, 단순한 열화인가

 

솔직히 말해서, 굳이 충분히 훌륭하고 아름다운 교회의 미학적 유산을 저버리고, 독창적이기만 한 이런 예술들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적어도 한국 교회 안에서 이런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는 바오로성미술연구소의 경우, 그 지도 사제인 박항오 마르티노 신부는 다음과 같이 그 뜻을 설명한다.

 

“종교미술의 역사적 관점에서 본다면 어느 시대에서나 교회에서 종교미술 작품을 필요로 할 때에는 당대에서 가장 훌륭한 예술가들에게 그 소임을 맡겼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아직까지도 외국 작품을 복제하는 수준에서 성물을 제작하는 사례가 비일비재 합니다.

…… 마침 바오로성미술연구소가 고명한 신자 예술가들과 뜻을 모아 ‘성물의 예술화’ ‘성물의 토착화’ 소명을 받고 체계적인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서양의 얼굴 모습이 아닌 우리를 닮은 정감 있는 성물, 부담 없이 다가 갈 수 있는 아름다운 성물을 제작 할 때가 되었습니다. 아프리카나 남미 등 성지를 순례할 때 그 나라의 토착화된 성물을 많이 접하게 됩니다.

한국 가톨릭 성물의 토착화와 한국 가톨릭교회의 토착화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아닐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도 훌륭한 가톨릭 미술가들이 있는데 다른 나라의 성물을 복제하여 사용하는 것을 보면서 참으로 안타까웠습니다. 우리나라다운 성물이 우리 교회와 신자들의 가정에서 신앙에 풍요로움을 더하여 주는 생명이 있는 성물이 되길 바랍니다.”

 

물론, 가톨릭교회는 교회 문화의 토착화를 절실히 장려하고 있다. 기실 지난 역사 동안 형성되어온 가톨릭교회의 모든 문화적 유산부터가, 여러 시대와 여러 문화권에 걸쳐 장기간에 이루어진 토착화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를 닮은”, “우리나라다운”, 성미술의 한국적인 토착화를 추구하는 것은 분명 바람직한 일이다. 그리스도교 예술 본연의 고상함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도, 성당 건축과 성미술의 한국적인 토착화를 훌륭히 이루어낸 예시들을 우리는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가톨릭교회의 사례는 아니나, 국내 성당 건축의 훌륭한 토착화의 예시로 손꼽히는 대한성공회 강화성당. (출처 : 지역N문화)
장우성, “성모자상”, 1954년.

 

 

한편, 바오로성미술연구소가 선보이는 “고명하신 예술가들의 품격 높은 창작 성물”(바오로성미술연구소 측에서 직접 사용하는 표현)들이 얼마나 한국적인지에 대해서는 각자가 직접 확인해보고 판단하는 것이 낫겠다. 바오로성미술연구소 웹사이트에 접속하여 수많은 작품들을 확인해볼 수 있다.

 

 

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 것인가

 

교회는 이렇게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어떻게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 특히, 이미 가톨릭적인 요소를 전혀 찾을 수 없게끔 지어져버린 신축 성당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폰티펙스 대학(Pontifex University)의 성미술 학부 학과장 데이비드 클레이튼 교수(Prof. David Clayton)는 동방 가톨릭교회와 정교회의 신자들이 성당이 아닌 공간에서 전례를 거행해야 할 때 사용하는 방법에서 영감받은 해결책을 제안한다. 공간이 형편 없더라도, 충분히 전통적이고 아름다운 제대와 제구들, 무엇보다 성화상을 장식함으로써 공간을 거룩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에 나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수십 년에 걸쳐 디자인된, 흉하고 전례적으로 부적절한 콘크리트 성당을 맡은 훌륭한 본당 사제와 대화를 나누었다. 신부님은 인테리어를 개선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야기해주었다.

첫번째로, 신부님은 돈을 모아야 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돈을 모으는 일은 뒤이을 다른 문제들에 비하면] 신부님이 처한 문제 중 가장 사소한 일이었다. 그런 다음에 신부님은 교구 건축학 위원회로부터 [개선된] 디자인을 승인받아야 하는데, 신부님은 자신과 본당이 제안한 어떠한 것도 위원회로부터 승인받지 못하리라고 확신했다. 셋째로, 신부님이 그러한 장애물들을 극복할 수 있다 가정한들, [해당 성당] 건물은 건축학적으로 특별한 관심을 끄는 구조물로 등재된 마당이다. (대체 누구의 관심을 끈다는 건지 싶다.)

그렇담 신부님은 어떻게 해야 할까? 효과적일 법한 아이디어가 있다. 나무로 조각된 덮개에 담긴 형태의 아름다운 휴대용 [성화상] 미술 작품들을 한정 수량으로 의뢰하는 것이다. 루드 스크린[rood screen, 동방 교회의 이코노스타시스 같은 것], 제단화 또는 잘 배치된 성화나 성상 같이 아름답게 제작된 휴대용 작품들을 의뢰하고 소유함으로써, 성직자는 전통적인 도상학과 거룩한 예술적 요소들을 어떠한 영감도 주지 못하는 공간에 재도입할 수 있다. 이렇게 하면 공간에 아름다움을 더해줄 뿐만 아니라 예술과 개인적인 연결을 가능하게 하여 회중에게 공간을 더욱 의미 있고 매력적으로 만들 수 있다.”

 

오늘날 신축 성당들 가운데 거의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제단화는 전통적인 성당 건축에서 제대 뒤 벽면에 장식된 성화상이나 부조를 가리킨다. 반드시 많은 비용을 들여 화려하고 정교한 제단 부조를 마련하지 않더라도, 훌륭한 성화 하나를 가볍게 장식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이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성 가롤로 보로메오 성당 대제대의 제단화. (출처 : Wikipedia)
캐나다 벤쿠버 성 베드로 사제 형제회 본당 제단의 이전 모습(왼쪽)과 리모델링 이후(오른쪽). (출처 : New Liturgical Movement)

 

가톨릭교회가 고수해온 종래의 아름다움이 지나치게 화려하며, 오히려 근래에 등장한 새로운 “아름다움”이 겸손, 가난과 청빈이라는 교회의 덕목을 특유의 소박함과 단순함으로 드러내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하지만 그 중 누구도 이 두 가지를 각각 장려하는 데 있어서 전자가 후자에 비해 더 많은 금전적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그 반대인지를 정직하게 계산해보는 사람은 없다.

 

적어도 노트르담 대성당의 경우는 더 볼품 없는 제의와 제대, 제구를 선보이기 위해 유명한 예술가와 디자이너에게 비용을 지불했다. 기존에 교회가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옛 것들을 그대로 사용했다면, 어떠한 비용도 들지 않았을 것이다.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가 예수님께 값 비싼 향유를 부어드렸을 때, 유다 이스카리옷은 “어찌하여 저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는가?”(요한 12,5)라고 따졌다. 그리고 유다는 지극히 높으시고 존귀하신 우리 주님을 그 향유 값의 수십 분의 일도 안 되는 고작 은돈 서른 닢에 팔아 넘겼다(마태 26,15 참조).

 

회칠한 무덤은 겉이 아름다워 보이더라도 속은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법이다(마태 23,2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