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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세상이 그리스도를 멸시할 때 홀로 빛나는 사크레쾨르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프랑스 대사관 근처 시위에서 파리 올림픽 개막식 장면과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비교하는 종이를 들고 있는 남성. (Andrea Alexandru/AP)

 

며칠 전 프랑스 파리에서 하계 올림픽이 개최되었습니다. 그런데 개막식부터 논란이 되었습니다. 여러 이질적인 퍼포먼스들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 그리스도교를 멸시한 것으로 보이는 묘사가 있었습니다. 해당 장면에서는 여장남자, 남장여자들을 비롯하여 LGBT 이데올로기를 반영하는 차림새를 한 트랜스젠더 및 드래그 아티스트들이 기다란 식탁 뒤에 나란히 서있고, 온몸을 파란색으로 칠한 배우가 옷을 거의 입지 않은 채로 등장하여 음란한 노래를 불렀습니다. ―이 자리에 있던 아티스트 중 하나가 성기를 그대로 노출하였다는 추가적인 논란이 있었으나, 이는 찢어진 스타킹을 오해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무엇보다 큰 논란을 자아낸 이유는 바로 이 퍼포먼스가 그리스도교를 조롱하고 멸시했다는 반발이 세계에서 쏟아져 나왔기 때문입니다. 일론 머스크뿐만 아니라 심지어 도널드 트럼프까지 비판의 목소리를 냈습니다. 전체적인 구도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유사했기 때문입니다. 

 

이에 프랑스 주교회의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조롱과 멸시를 두고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했습니다. 아래는 그 전문입니다.



대회 개막식에 대한 프랑스 주교회의와 홀리 게임즈의 입장


파리 올림픽을 앞두고, 홀리 게임즈 프로젝트는 우리 나라가 주최하는 이 장대한 행사 즉 파리 올림픽을 둘러싼 스포츠 및 대중적 열정을 나누고자 3년 가까이 많은 수의 가톨릭 신자들을 동원하였습니다.

지난주, 우리는 많은 종교계, 정치계, 스포츠계 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올림픽 휴전 개막 미사를 주관하게 되어 기뻤습니다.

우리를 하나로 모아 국가들과 마음들 사이의 평화를 증진하는 이 스포츠를 중심으로, 모두의 신념을 존중하면서 우리 세계에 절실히 필요한 일치와 형제애의 필요성에 대하여, 우리는 스포츠와 올림피즘이 표현하고 전파하는 가치와 원칙이 이에 이바지한다고 믿습니다.

어젯밤 파리올림픽조직위원회가 주최한 개막식은 전 세계에 아름다움과 기쁨, 큰 감동의 순간을 선사하여 주었으며 보편적인 찬사를 받았습니다.

안타깝게도 본 개막식은 그리스도교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어 우리로 하여금 깊이 유감스럽게 하였습니다.

다른 신앙을 고백하는 [교파들 가운데서도] 우리와 함께 연대를 표명해 주신 구성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특정한 장면의 터무니없는 도발로 인하여 상처받은 모든 대륙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올림픽 축제가 몇몇 예술가들의 이데올로기적인 편견을 훨씬 뛰어넘는다는 것을 그들이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스포츠는 선수와 관중 모두의 마음에 깊은 기쁨을 주는 인간의 훌륭한 활동입니다.

올림피즘은 인류의 일치와 형제애라는 실재에 봉사하는 운동입니다.

경쟁의 장이 모두에게 진실과 위안, 기쁨을 가져다주기를!


 

이 외에도 전 세계의 수많은 주교들이 비판의 뜻을 밝혔고, 특히 “인터넷의 주교”라고 불릴 정도로 소셜 미디어를 정말 잘 활용하는 미국의 로버트 배런 주교는 자신의 SNS에 공개한 영상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에 대한 중대한 멸시였습니다. …… 이것이 그리스도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순간임을 나타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에서 십자가를 예상하시며 당신 몸과 피를 내어 주십니다. …… 프랑스는 교회의 장녀라고 불려왔습니다. 파리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습니까? 토마스 아퀴나스도 파리에서 가르쳤고, 빈첸시오 드 폴이 파리에 있었고, 루이 9세 왕, 즉 성 루도비코가 파리에 있었고, 프랑스는 가톨릭 선교사들을 전 세계로 파견했습니다. 프랑스의 문화, 곧 개인과 인권, 자유에 대한 존중은 그리스도교에 정말 많은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 질문을 제기하고 싶은 것이, 우리는 다 답을 알고 있습니다만, 그들이 감히 같은 방식으로 이슬람을 멸시할 수 있었을까요? …… 나아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소심하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의 목소리가 들리게 해야 합니다.”

 

한편, 올림픽 개막식에서의 퍼포먼스가 최후의 만찬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얀 판 베일레르트의 “신들의 축제”(Le Festin des Dieux)라는 작품을 묘사한 것이라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되었지만, 해당 퍼포먼스에서 식탁의 가운데 자리를 차지했던 LGBT 활동가 바르바라 부치(Barbara Butch)가 직접 자신의 SNS에서 최후의 만찬을 겨냥했음을 밝힌 탓에 전혀 논란을 잠재우지 못했습니다.

Jan van Bijlert, Le Festin des Dieux, c. 1635-1640. (왼쪽) / 바르바라 부치의 인스타그램 스토리. (오른쪽)

 

세계 각지와 교회 안팎에서 비판이 거세지자, 파리올림픽조직위원회는 대변인을 통하여 사과를 표했습니다. “어떠한 종교 단체에 대해서도 무례함을 보이려는 의도는 확실히 아니었습니다. [개막식은] 공동체의 똘레랑스를 기념하려 했습니다. 우리는 이 야망이 달성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불쾌감을 느낀 사람들이 있다면 정말 죄송합니다.”

 

 

속죄와 배상의 정신

 

그러나 이는 단지 특정 개인들을 탓하거나 분노하는 것, 사과를 받아내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닙니다. 미국 미네소타주 크룩스톤 교구의 앤드류 코젠스 주교(Bp. Andrew Cozzens)는 이것이 “악랄하고” “사악한” 모독이었음을 지탄하며, 이러한 죄악에 가담한 이들의 치유와 용서 그리고 주님께 끼쳐드린 모독을 배상하기 위하여 더 많은 기도와 단식을 행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미국 위스콘신주 매디슨 교구의 도널드 하잉 주교(Bp. Donald Hying) 역시 SNS를 통하여 신자들에게 “파리의 모독”을 배상하기 위한 “단식과 기도”를 청했습니다.

 

예수회 언론 아메리카의 부편집장 잭 데이비스(Zac Davis)는 말했습니다. “사실 저는 모욕을 당하는 일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도 그렇게 신경 쓰지 않으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가 범하는 모든 죄는 주님을 욕되게 하며, 실제로 2천 년 전 게쎄마니에서 주님께서는 우리가 오늘날 짓는 죄들을 미리 예견하시고 더 큰 고통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만큼, 주님을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비유나 상징적인 의미가 아니라 실제로 말입니다.

 

1928년, 교황 비오 11세는 성심께 대한 배상에 관한 회칙 「지극히 자비로우신 구속주」(Miserentissimus Redemptor)를 발표하여, 이러한 진실이 예수 성심께 대한 신심과 긴밀한 관계에 있음을 밝혔습니다.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에 바치는 경배에 있어서 속죄와 배상의 정신은 진실로 언제나 우선하고 앞서는 자리를 차지하여 왔으며, 역사와 관습의 기록뿐만 아니라 거룩한 전례와 최고 교종의 법령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속죄 및 보속의 정신보다] 이러한 신심 형태의 기원, 성격, 힘, 빼어난 관습에 더 부합하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께서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사랑의 무한함을 선언하셨을 때, 동시에 애절한 이의 태도로,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당신께 너무나 많고 크나큰 상처를 입혔다고 호소하셨다. ―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시는 이 말씀이 신자들의 마음 속에 고정되어, 망각으로 지워지지 않기를 바라는 바이다. “이 마음을 보라.” ―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다. ― “[이 마음은]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여 모든 유익을 그들에게 가득 태워 주었으나 이 한 없는 사랑은 종종 더욱 특별한 사랑의 빚과 의무에 매인 사람들로부터도 돌려받는 것 없이 도외시당하였고 모욕만 당하였도다.” 이러한 탓을 씻어내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행할 것을 몇 가지 권고하셨는데, 특히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 즉 사람들이 속죄할 목적으로 제대에 나아가 속죄의 영성체라고 불리우는 것을 행할 것, ― 또 마찬가지로 한 시간 동안 계속하여 속죄를 위한 탄원와 기도를 바칠 것 ― 즉 “성시간”이라고 올바로이 불리우는 것을 권고하셨다. 이와 같은 경건한 활동은 교회의 인가를 받았으며, 방대한 대사로 풍요로워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천상 지복 가운데 통치하고 계신 지금에 와서 이러한 속죄의 예식이 어떻게 그리스도께 위안을 드릴 수 있는가? 이에 대하여 우리는 “사랑이 있는 사람을 내게 준다면,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In Johannis evangelicum, tract. XXVI, 4)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이 매우 적절하다고 답할 수 있다. 누구든지 하느님께 대한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이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본다면,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가운데 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을 위한 수고와 고통, 크나큰 고뇌에 시달리심과 슬픔으로 인하여 거의 기진맥진하심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 때문”에 “으스러진 것”(이사 53,5)을, 그리스도의 으스러지심으로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을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경건한 이들의 정신은 이 모든 것을 더욱 진실히 묵상한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에 저질러진 사람들의 죄와 범죄가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고, 이제 그 사람들 자신도 동일한 비탄과 고통에 가담하여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며, 각인각색의 여러 죄가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 주님의 수난을 갱신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아들을 다시 제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욕을 보이는 셈이니”(히브 6,6). 이제 아직 미래의 일임에도 예견되어진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영혼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에 잠기게 되었다면, 역시 그때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피로함과 괴로움으로 억눌린 그 마음이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난”(루카 22,43) 때, 마찬가지로 예견된 것으로서 우리의 배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위안을 얻으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리하여 지금에 와서도 우리는 놀랍고도 진실된 방식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죄로 인해 끊임없이 상처를 입으시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께 위로를 드릴 수 있고 또 위로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 우리가 거룩한 전례 가운데 읽었듯이 ―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기자의 입을 통해 당신께서 당신 친구들에게 버림받았음을 호소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모욕이 제 마음을 바수어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시편 69,21).

여기에 속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이 당신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갱신되고 어떤 의미로는 계속되며 완성된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이러하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받으셔야 할 무엇이든지 다 고통받으셨으니 고통의 양에 있어서 부족할 게 없습니다”(In Psalm IXXXVI). 실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살기를 내뿜는”(사도 9,1) 사울에게 설명하시고 설하시면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라고 말씀하시어, 교회에 대하여 박해가 일어나면 교회의 신적 머리이신 당신 자신께서 공격과 괴로움을 당하신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 주셨다. 따라서 당신 신비체 안에서 여전히 고통을 당하고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 속죄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며, 이는 또한 당신과의 친밀한 일치에 의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바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들”(1코린 10,27)이므로, 머리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들이 더불어 고통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이다(1코린 10,26 참조).”[각주:1]

 

주님의 성심은 우리의 죄악과 배은망덕, 모욕 때문에, 또한 교회에 대한 박해 때문에 실제로 고통을 겪으시고 수난을 당하십니다. 동시에,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배상의 행위로써 주님의 성심은 실제로 위로와 위안을 받으십니다. 

 

오늘날 이 사실은 너무나도 쉽게 잊혀집니다. 예수 성심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에 대해서는 너도 나도 이야기하지만, 주님의 수난,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상처, 그리고 주님께 위안을 드리기 위한 배상 행위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고통의 사람

 

역사적으로 예수 성심 도상은 주님의 수난을 묘사하는 ‘경건한 형상’(Andachtsbilder)에 기원을 두고 있습니다. 경건한 형상 가운데 대표적인 도상은 ‘고통의 사람’(Man of Sorrows)으로서, 상기한 비오 11세의 회칙에서도 인용된 시편 53편, 특히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배척당한 그는 고통의 사람, 병고에 익숙한 이였다”(시편 53,3)라는 구절에서 그 명칭이 유래되었습니다.

 

고통의 사람 도상은 주님의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상처에서 피를 흘리는 그리스도의 얼굴은 단순히 육체적인 아픔에 젖어있는 것 같다가도 그 이상의 정서적인 슬픔이 서려있습니다. 고통의 사람이 드러내는 그리스도의 수난과 고통에 대한 깊은 묵상은 예수 성심 신심의 뿌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Meister Francke: Man of sorrows, with angels, c. 1430. (왼쪽) / German woodcut with hand-colouring, 1465-70. (오른쪽)

 

고통받는 한 사람을 마주했을 때 인간이 느끼는 가장 자연스러운 감각은 연민입니다. 그 사람이 겪는 고통을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모방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가 주님을 연민하기에 앞서 우리를 연민하셨습니다. 우리가 ‘고통의 사람’에서 마주하는 것은 불의의 사고를 당한 사람의 불행도 아니고 어떤 부당한 권력에 의해 탄압당한 피지배자의 설움도 아닙니다. 그것은 연민 그 자체입니다. 죄와 죽음에 허덕이는 이 인류에 대한 하느님의 연민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스스로 택하신 상처를 우리는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그러한 고통에 처하게 만든 것은 우리 자신이 늘상 범하여 하느님을 욕보인 죄들입니다. 그 죄들은 실로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가 묵상했던 그대로, 범하지 않았더라면 주님께서 덜 고통스러우셨을 것이며 범함으로써 주님을 더 고통스럽게 만든 원인입니다.

 

“아, 나의 사랑하올 예수여, 나는 이 동산에서 님을 찌르는 채찍도 가시도 못도 보지 못하였사온데, 어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피로 물든 님을 내가 보았나이까? 나의 죄는 괴로움과 슬픔으로 말미암아 님의 마음에서 너무나 많은 피를 흘리게 한 잔인한 압박이었나니 앙화로소이다. 나의 죄로 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데 제일로 이바지한 나는 님의 가장 잔혹한 사형집행인 중 한 명이었나이다. 나 죄를 덜 지었더라면 님께서, 나의 예수께서 고통을 받으셨음이 확실하도소이다. 나 님을 욕 보임으로써 기쁨을 누린 만큼 이미 고뇌로 가득 찬 님 마음의 슬픔을 더 심하게 만들었나이다. 하오면 님께서 나에게 보여주신 사랑과 님의 수난에 나 슬픔과 고통을 더함으로써 보답한 일을 목도할 때에, 이러한 생각이 어찌 나를 비탄으로 죽게 하지 않을 수가 있겠나이까? 나에게 너무나 많은 사랑을 보여주신, 사랑스럽고 또 사랑받아 마땅하올 이 마음을 나는 고문하였나이다. 나의 주여, 나에게는 이제 당신을 욕되게 한 나의 잘못을 두고 슬피 우는 것 외에는 당신을 위로할 길이 없사오니, 나의 예수여, 나는 이제 그것에 대하여 슬퍼하고 내 온 마음으로 탄식하리이다. 아아, 님께 나 비옵나니, 그것을 위하여 나 마지막 숨을 거둘 때까지 님께 나 끼쳐드린 불쾌함을 두고 울만한 크나큰 고통을 주소서.”[각주:2]

성 알폰소 마리아 데 리구오리.

 

내 죄 때문에 고통받은 그리스도를 목도하였을 때 사람이 가져 마땅할 마음에 대해 이보다 더 탁월한 표현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이 마음을 점차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안락함과 편안함만을 제공하는 신앙을 추구하고, 또 하느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존재가 되든 간에 무조건적으로 즐거워하시고 우리를 반겨주시는 그런 하느님 상(像)을 만들어 냅니다. 우리가 그런 거짓된 하느님 상을 떠올리며 예수 성심을 바라보아서는 결코 안 되겠습니다.

 

 

파리의 어둠 가운데 홀로 빛난 예수 성심 대성당

 

올림픽 개막식에서의 독성죄는 수난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성체성사 바로 그것을 모욕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모욕이 벌어진지 하루가 채 되지 않아, 파리에서는 정전이 발생하여 짙은 어둠이 드리웠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 가운데, 오직 한 곳만 전기가 끊어지지 않은 채로 밝게 빛났습니다. 바로 사크레쾨르 드 몽마르트 대성당, 즉 몽마르트의 예수 성심(Sacré-Cœur) 대성당이었습니다.

파리 정전 가운데 홀로 빛나는 사크레쾨르 대성당. (MSN)

 

사크레쾨르 대성당의 건립은 1870년 보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한 이후 낭트 교구의 펠릭스 푸르니에 주교(Bp. Félix Fournier)가 제안한 것이었습니다. 푸르니에 주교는 프랑스의 패배가 프랑스 혁명 이후의 국가적인 도덕의 쇠락에 대한 하느님의 천벌이라고 생각했으며, 예수 성심께 봉헌된 성당이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푸르니에 주교와 협력하여 사크레쾨르 대성당 건립의 자금을 모금하는 데 큰 도움을 준 것은 복자 프레데릭 오자남이 창립한 성 빈첸시오 아 바오로회의 회장 알렉상드르 레정티(Alexandre Legentil)였습니다. 레정티 역시 프랑스가 전쟁에서 패배한 것과 당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들이 교황 복자 비오 9세를 포로로 삼은 것은 프랑스가 지은 죄에 대한 정당한 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우리는 시인하는 바, 우리에게 죄가 있으며 정당한 벌을 받았습니다. 우리 죄를 영예로이 갚기 위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성심께서 지니신 무한한 자비와 사죄를 얻기 위하여, 뿐만 아니라 감금당하신 우리 최고 교종을 풀어주고 프랑스의 불행을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하고 비범한 도움을 얻기 위하여, 우리는 파리에 예수 성심께 봉헌하는 성전을 세우는 데 이바지할 것을 서약합니다.”

 

주님께 대한 프랑스의 죄악을 배상하기 위하여 세워진 사크레쾨르 대성당은 최근까지 프랑스 내 좌익 인사들의 공격과 비판의 대상이 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이 대성당은 다시 한 번 프랑스에서 벌어진 역겨운 독성죄로 인해 파리에 드리운 어둠 가운데 홀로 찬란히 빛났습니다.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말했습니다. “섭리의 설계 가운데 단순한 우연이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전 세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상처를 받은 이 와중에 우리가 가장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주님 당신의 마음에 벌어진 상처임을 드러내 보여 주셨습니다. 

 

예수 성심은 1년 가운데 6월 한 달에만 묵상하고 말 것도 아니고, 예수 성심 대축일 하루만 특별히 기념하고서 바로 잊어버려 괜찮을 것도 아닙니다. 예수 성심은 오늘날까지 만인이 짓는 모든 죄로 상처받으시는 바로 지금 이 순간에 주님께서 직접 우리 모두에게 위로를 청하시는 간곡한 호소입니다.

 

세상이 그리스도를 멸시하여 드리운 어둠 가운데, 과연 사크레쾨르만이 홀로 빛났습니다….


  1. 교황 비오 11세, 회칙 「지극히 자비로우신 구속주」(Miserentissimus Redemptor), 1928.5.8., 12-14항, ofelixculpa.com 번역. [본문으로]
  2. St. Alfonso Maria de Liguori, The complete works of Saint Alphonsus de Liguori : the ascetical works: Volume 5 The Passion And The Death Of Jesus Christ (New York : Benzinger Brothers), 1887, pp. 67-68, ofelixculpa.com 번역.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