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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고통을 치워버린 탓에 부패하는 신앙

The Master of the Stories of Mary in Aachen, “The Man of Sorrows and the Mater Dolorosa”, German, c. 1485, Aachen, Domschatzkammer.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의 지시[각주:1]에도 불구하고, 적잖은 성당들이 제단에 십자고상을 놓지 않는다. 물론 평상시에 십자고상이 없더라도 미사 전례 때 행렬용 십자고상을 배치한다면야 괜찮겠다만은 그조차도 하지 않는 본당들도 더러 있다. 설령 미사 때 십자고상을 놓더라도 최대한 고통당하는 그리스도의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게끔 아주 작거나, 지나치게 추상화되었거나, 일말의 고통도 보이지 않는 그런 십자고상을 놓으려 한다. (애당초 ‘고상’(苦像)이긴 하려나?)

 

17세기 교황 베네딕토 14세 당시에도 이런 모습이 로마와 주변 지역 교회들에서 나타났던 모양이다. 물론, 베네딕토 14세는 이러한 상황을 “부패”(corruzióne)라고 부르며 질타했고, 미사 때 사제와 신자들이 똑똑히 목격할 수 있게끔 제단에 십자고상을 놓도록 명했다.

 

“십자고상이 없다든지, 집전 사제 앞에 부적절한 방식으로 놓여 있다든지, 집전 사제와 참석자 회중의 시야에서 거의 벗어날 정도로 대단히 작은 십자고상이 있다든지 하는 제대에서 미사가 집전되는 것을 본인은 결코 허용할 수 없습니다. 이는 교회법 및 교회 규율, 즉 법전과 기타 교회 준칙에 수록된 내용에 위배되며, 이것은 또한 신성한 고대의 관행과 동방 교회들의 관례에도 지극히 위배되는 것입니다.

 

…… 그리하여 집전 사제와 희생 제사에 참례하는 회중이 동일한 십자고상을 쉽게 볼 수 있어야 하는데, 소형 성화상에 부착된 작은 십자가만 신자들에게 보여지는 일은 있어선 안 됩니다. 만약 이러한 부패가 교구 가운데 눈에 띄게 퍼지지 않았다면, 교회 장상들이 수도 사제나 교구 사제에게 이 문제를 개인적으로 알리면 쉽게 근절될 수 있을 것입니다.”[각주:2]

 

“기도의 법은 믿음의 법이다”(Lex orandi, lex credendi)라는 가톨릭교회의 오래된 격언이 뜻하는 바와 같이, 전례는 우리의 신앙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전례에서 그리스도의 수난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내어 쫓으려는 이 유행, ―그리스도의 대리자께서 매우 적절하게 말씀하신 바대로― 이 “부패”가 전례 가운데 벌어지고 있다면, 동시의 우리의 신앙에서도 그리스도의 수난을, 고통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부패’가 벌어지고 있다 하겠다.

 

실로 우리 신앙은 점점 부패하고 있다.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가 너무나도 거북한 것이다. 자고로 신앙이란 매사에 기쁨과 즐거움이 넘쳐야만 하고 슬픔이니 고통이니 통회니 하는 그런 것들은 불쾌하다 못해 아주 해로운 것이므로 우리 눈 앞에서 치워버려야 마땅하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것들을 조금만 입밖에 꺼내고 상기시킨다 하면, 심지어 사제조차도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 앞에 까막눈이 된 채 “강박신경증적 신앙”에 시달리는 세심하고 우중충한 신앙인으로 몰아가기 일쑤다.

 

재의 수요일이 보름도 채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수난을 생각하며 주님의 부활을 준비해야 할 이 사순 시기를 도무지 어떻게 지내야 할지, 기쁨과 즐거움만을 좇는 우리에게는 너무나도 낯설고 막막한 일이다. 대부분의 가톨릭 신자들은 아직 연중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일부 가톨릭 신자들은 이미 자주색 제의를 입은 사제와 함께 “알렐루야”를 노래하지 않는 미사를 드리고 있다. 1960년대 전례 개혁 이전의 옛 로마 전례서를 따르고 있는 신자들은 지난 주일부터 재의 수요일 전까지 ‘칠순 시기’(Septuagesima)를 기념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디 옛 로마 전례에서는 사순 시기뿐 아니라 그 이전의 세 번의 주일을 순서대로 칠순(Septuagesima), 육순(Sexagesima), 오순(Quinquagesima) 주일로 기념한다. 이때부터 사제는 자주색 제의를 입고 미사 때 “알렐루야”를 노래하지 않는다. (칠순 시기는 1969년 교황 성 바오로 6세에 의해 폐지되어, 현행 로마 전례에서는 연중 시기의 일부로 기념하고 있다.) 그러한 지난 칠순 주일 다음날 월요일은 2월 17일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이는 또한 마리아의 종 수도회 창설자 7성인의 기념일이었다.

 

 

고통의 사람, 고통의 어머니

 

마리아의 종 수도회(Servite Order)는 13세기 이탈리아 피렌체 귀족 가문 출신 일곱 명의 남성들에 의해 창설되었다. 이들의 이름은 각각 성 보나준타, 성 마네토, 성 아마데오, 성 후고, 성 소스테네오, 성 본필리오, 그리고 성 알렉시오다. 영적인 우정으로 단단히 묶여 친구로 지내던 이 일곱 성인들에게 1233년 성모 승천 대축일 날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서 나타나시어 세상을 떠나 하느님께 전적으로 헌신하라는 말씀을 주셨다. 성모님께서는 1240년에도 그들에게 나타나셨고, 성모님의 뜻에 따라 이들은 마리아의 종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이들의 주된 카리스마는 주님의 수난과 불가분하게 결합되어 있는 성모님의 고통에 대한 신심을 퍼트리는 것이었다. 매년 9월 15일에 지내는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은 바로 이들이 전한 신심의 결실이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께 직접 수도복을 하사받는 마리아의 종 수도회 창설자 7성인. Agostino Masucci, “The Madonna with the Seven Founders of the Servite Order”, c. 1728, Art Institute of Chicago.

 

 

구속사업에 있어서 주님의 무한한 공로와 성모님의 유한한 공로는 결코 동등하지 않더라도, 골고타 언덕에서 성모님께서는 아드님과 함께 고통받으시며 주님의 복된 수난에 탁월하게 연합하셨다. 시메온은 성모님께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릴 것”(루카 2,33)이라고 예언했다. 과연 그 예언대로,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가 말했듯이― 죽임당하신 그리스도의 옆구리가 창에 찔렸을 때, 복되신 동정녀의 영혼 또한 그 창에 꿰찔렸다.

 

“복되신 성모여, 예리한 칼이 당신의 영혼을 창으로 찔렀습니다. 그 칼이 당신의 영혼을 찌름 없이는 당신 아드님의 육신을 꿰뚫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이의 것이지만 특별히 당신의 것인 아들 예수께서 숨을 거두신 후, 그 잔혹한 창은 그분의 영혼에 가 닿을 수 없었습니다. 실상 그분이 죽임당하신 후 불능의 상태에서마저 마냥 두지 않은 그들이 그분의 옆구리를 펼쳐 놓았을 때, 그분께 고통을 줄 수 없었지만 당신께는 그러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창은 당신의 영혼을 찔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영혼은 더 이상 거기에 계시지 않았으나 당신의 영혼은 거기서 떨어져 나오지 못했습니다. 당신의 영혼은 고통의 창으로 찔리었기에 우리는 당신이 순교자들을 능가하시는 분이라고 마땅히 일컫습니다. 당신 아드님의 수난에 참여함은 그 강렬함에서 순교의 모든 육체적 고통을 능가했기 때문입니다.

 

…… 아드님께서 육신으로 죽으실 수 있었다면 마리아께서는 영신으로 그 죽음에 참여할 수 없으셨겠습니까? 아드님은 다른 어떤 사람의 사랑보다 더 위대한 사랑으로 죽임을 당하셨고 마리아께서는 그리스도를 제외한 다른 어는 누구의 사랑에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으로 그 죽음에 참여하셨습니다.”[각주:3]

 

교황 레오 13세는 마리아께서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 밑에서 자신을 함께 봉헌하셨고, 육신으로 죽으신 예수님과 함께 마음으로 죽으셨다고 가르쳤다.

 

“예수님께서 고뇌에 빠지셨던 겟세마니에서도, 채찍질당하시고 가시관이 씌워져 사형 선고를 받으신 법정에서도, 우리는 마리아를 찾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마리아께서는 이 모든 고뇌 앞에 앞서 아셨습니다. 이를 아셨고 또 보셨습니다. 마리아께서 어머니의 지위를 위하여 자신을 주님의 종으로 선언하셨을 때, 자신의 자녀이신 예수님을 자신과 함께 제단 발치에서 봉헌하셨을 때, 그때부터 마리아께서는 자신의 아드님께서 세상의 죄를 위하여 치루신 수고스런 속죄에 참여하셨습니다. 따라서 마리아께서 자신의 영혼 매우 깊은 곳에서, 예수님의 지극히 격렬한 고통과 학대와 함께 고통받으셨음이 확실합니다. 더 나아가 마리아께서 희생 제물[예수님]을 품고 기르셨던 목적인 바 신적인 희생 제사가 마리아의 눈 앞에서 이루어져야 하였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에, 그 가장 애처로운 신비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할 때,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 그분의 어머니도 서 계셨습니다. 마리아께서는 애덕의 기적으로 우리를 자신의 아들들로 받아들이실 수 있었고, 신적 정의이신 그분 자신의 아드님께 [우리를] 너그러이 봉헌하셨으며, 고통의 칼에 찔리시어 예수님과 함께 마음으로 죽으셨습니다.”[각주:4]

 

교황 성 비오 10세는 마리아께서 예수님의 수난에 전적으로 참여하여 아드님과 의지 그리고 고통의 연대를 이루셨고, 세상을 두고 배상하시는 분, 아드님께서 얻어내신 모든 은총의 가장 합당한 분배자가 되셨다고 가르쳤다.

 

“아드님의 가장 중요한 시간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께서 서 계셨습니다. 단순히 참혹한 광경을 관상하는 데 머무르신 게 아니라, 자신의 외아드님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봉헌되신 것을 기뻐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수난에 전적으로 참여하시고, 가능하다면 자신의 아드님께서 견디셨던 모든 학대를 기꺼이 견디셨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마리아 사이에 의지 그리고 고통의 이러한 연대로부터 마리아께서는 잃어버린 세상을 두고 배상하시는 분[Reparatrix]이, 또 우리 구세주께서 죽음과 성혈로 얻어내신 모든 선물의 분배자[Dispensatrix] 되시는 공로를 가장 합당하게 얻으셨습니다.”[각주:5]

 

교황 베네딕토 15세는 이런 맥락에서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구속하셨다고 가르친다.

 

“마리아께서는 고통당하셨고, 말하자면 고통당하신 아드님과 함께 거의 죽으실 뻔하셨습니다.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마리아께서는 어머니로서의 권리를 버리시고 자신에게 달려 있는만큼은 신적인 정의[하느님]를 달래드리기 위하여 아드님을 봉헌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마리아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구속하셨다[Ipsam cum Christo humanum genus redemisse]고 옳게 말할 수 있습니다.”[각주:6]

 

우리 인류를 위하여,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어떠한 죄도 없으신 예수 마리아께서 겪으신 구속적 고통을 역사의 그리스도인들은 결코 잊지 않으려 했다. 그리스도교 도상학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고통은 ‘고통의 사람’(Vir Dolorum), 동정 마리아의 고통은 ‘고통의 어머니’(Mater Dolorosa)라 이름 붙여진 도상으로서 신자들에게 매우 인기 있는 묵상 주제였으며 중세 가톨릭 신자들에게 있어서 경건함이라는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통의 사람과 고통의 어머니는 여러 성화상을 통해 별개로 묘사되기도 하였고 함께 묘사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은 중세사 및 미술사 전공자의 블로그 Ad Imaginem Dei에서 찾아볼 수 있다.)

Dieric Bouts, “The Mourning Virgin; The Man of Sorrows”, 16th century,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Adriaen Isenbrant, “Ecce Homo with the Mourning Virgin”, Flemish, c. 1530-1540,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Bartolome Esteban Murillo, “The Man of Sorrows and the Mater Dolorosa Spanish”, c. 1670-1675, Private Collection.

 

아래 이미지의 하단에는 라틴어로 “Aspice qui transis quia tu mihi causa doloris”라고 적혀 있다. 이는 “지나가는 이여, 보라! 너는 내 고통의 원인이다”라는 뜻이다. 이 앞을 지나치는 우리로 하여금, 예수 마리아께서는 우리 때문에 고통당하셨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Wolf Traut, “The Man of Sorrows and the Mater Dolorosa”, German, 1512, Washington, National Gallery of Art.

 

 

예수 마리아를 더 아프게 해드리는 우리

 

실로 예수 마리아께서는 우리 때문에 고통당하셨다. 그뿐 아니라, 십자가 수난 이후로도 인류가 모든 시대에 매일 같이 범하는 모든 죄들을, 시간을 초월하시는 하느님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미리 내다 보시고 겟세마니 언덕에서 더욱 고통을 당하셔야 했다. 즉 오늘날 우리가 죄를 짓는다면, 바로 그 죄 때문에 그리스도는 실제로 고통당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 크나큰 고통을 복되신 동정녀께서는 함께 하셨다. 지극히 거룩하신 예수 성심과 티 없으신 마리아 성심께 대한 헌신과 신심의 근간에는 우리가 매일 같이 범하는 죄로 인하여 상처를 입혀드린 예수 마리아께 대한 배상(reparation)이 자리하고 있다.

 

교황 비오 11세는 예수 성심 신심에 대한 회칙 「지극히 자비로우신 구속주」(Miserentissimus Redemptor)에서 이러한 사실을 매우 명확하게 풀어냈다.

 

“예수님의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에 바치는 경배에 있어서 속죄와 배상의 정신은 진실로 언제나 우선하고 앞서는 자리를 차지하여 왔으며, 역사와 관습의 기록뿐만 아니라 거룩한 전례와 최고 교종의 법령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속죄 및 보속의 정신보다] 이러한 신심 형태의 기원, 성격, 힘, 빼어난 관습에 더 부합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르가리타 마리아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사랑의 무한함을 선언하셨을 때, 동시에 애절한 이의 태도로, 배은망덕한 사람들이 당신께 너무나 많고 크나큰 상처를 입혔다고 호소하셨습니다. ― 본인은 그리스도께서 호소하시는 이 말씀이 신자들의 마음 속에 고정되어, 망각으로 지워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 마음을 보라.” ―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이 마음은]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여 모든 유익을 그들에게 가득 태워 주었으나 이 한 없는 사랑은 종종 더욱 특별한 사랑의 빚과 의무에 매인 사람들로부터도 돌려받는 것 없이 도외시당하였고 모욕만 당하였도다.” 이러한 탓을 씻어내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행할 것을 몇 가지 권고하셨는데, 특히 주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것, 즉 사람들이 속죄할 목적으로 제대에 나아가 속죄의 영성체라고 불리우는 것을 행할 것, ― 또 마찬가지로 한 시간 동안 계속하여 속죄를 위한 탄원와 기도를 바칠 것 ― 즉 “성시간”이라고 올바로이 불리우는 것을 권고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경건한 활동은 교회의 인가를 받았으며, 방대한 대사로 풍요로워졌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미 천상 지복 가운데 통치하고 계신 지금에 와서 이러한 속죄의 예식이 어떻게 그리스도께 위안을 드릴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하여 본인은 “사랑이 있는 사람을 내게 준다면, 그는 내가 말하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In Johannis evangelicum, tract. XXVI, 4)라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이 매우 적절하다고 답할 수 있겠습니다. 누구든지 하느님께 대한 큰 사랑을 지닌 사람이 과거의 시간을 되돌아본다면,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가운데 거하여, 그리스도께서 “우리 인간과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사람을 위한 수고와 고통, 크나큰 고뇌에 시달리심과 슬픔으로 인하여 거의 기진맥진하심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악 때문”에 “으스러진 것”(이사 53,5)을, 그리스도의 으스러지심으로 우리를 치유하시는 것을 목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경건한 이들의 정신은 이 모든 것을 더욱 진실히 묵상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시대에 저질러진 사람들의 죄와 범죄가 그리스도를 죽음에 이르게 한 원인이었고, 이제 그 사람들 자신도 동일한 비탄과 고통에 가담하여 그리스도를 죽음으로 이끌 것이며, 각인각색의 여러 죄가 각자의 방식으로 우리 주님의 수난을 갱신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다시 제 손으로 십자가에 못박아 욕을 보이는 셈이니”(히브 6,6). 이제 아직 미래의 일임에도 예견되어진 우리의 죄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영혼이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통에 잠기게 되었다면, 역시 그때에 이미 그리스도께서, 피로함과 괴로움으로 억눌린 그 마음이 위로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천사가 하늘에서 나타난”(루카 22,43) 때, 마찬가지로 예견된 것으로서 우리의 배상으로부터 어느 정도 위안을 얻으셨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지금에 와서도 우리는 놀랍고도 진실된 방식으로,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들의 죄로 인해 끊임없이 상처를 입으시는 지극히 거룩하신 성심께 위로를 드릴 수 있고 또 위로를 드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 우리가 거룩한 전례 가운데 읽었듯이 ― 그리스도께서는 시편 기자의 입을 통해 당신께서 당신 친구들에게 버림받았음을 호소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모욕이 제 마음을 바수어 저는 절망에 빠졌습니다. 동정을 바랐건만 허사였고 위로해 줄 이들을 바랐건만 찾지 못하였습니다”(시편 69,21).

여기에 속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수난이 당신 신비체인 교회 안에서 갱신되고 어떤 의미로는 계속되며 완성된다는 사실을 덧붙일 수 있겠습니다. 성 아우구스티노의 말을 다시 한 번 인용하자면 이러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고통받으셔야 할 무엇이든지 다 고통받으셨으니 고통의 양에 있어서 부족할 게 없습니다”(In Psalm IXXXVI). 실로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여전히 살기를 내뿜는”(사도 9,1) 사울에게 설명하시고 설하시면서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 9,5)라고 말씀하시어, 교회에 대하여 박해가 일어나면 교회의 신적 머리이신 당신 자신께서 공격과 괴로움을 당하신다는 것을 명백하게 드러내 주셨습니다. 따라서 당신 신비체 안에서 여전히 고통을 당하고 계신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당신 속죄에 참여하기를 원하시며, 이는 또한 당신과의 친밀한 일치에 의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지체들”(1코린 10,27)이므로, 머리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들이 더불어 고통을 받아야만 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12,26 참조).[각주:7]

 

주님의 성심은 우리의 죄악과 배은망덕, 모욕 때문에, 또한 교회에 대한 박해 때문에 실제로 고통을 겪으시고 수난을 당하신다. 동시에,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배상의 행위로써 주님의 성심은 실제로 위로와 위안을 받으신다.

 

 

부패하는 신앙

 

오늘날 신자들은 예수 성심을 통해 드러나는 주님의 무한한 사랑과 자비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이야기하지만, 주님의 고통, 우리 죄 때문에 그분의 마음에 끼쳐드리는 상처,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과 그분의 어머니를 위로해드리기 위한 배상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럴만도 하다.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주님께서 수난하시고 죽으신 것이 죄송스럽고 또 감사하기야 하다만, 내가 죄를 짓든 안 짓든 어차피 인류의 죄 때문에 받으셔야 했을 고통이고 고난이니 내 책임이 덜한 것처럼 느껴지고 또 이미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니 그저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야 그만일 노릇 아니겠는가? 그런데 내가 매일 같이 범하는 죄 때문에 예수님께서 실제로 더 고통을 겪으셔야 한다니? 실로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하며 우리 마음에서 이 끔찍한 이야기를 몰아낼 법 하다! 

 

자, 이제 이런 끔찍하고 역겨운 이야기는 우리 가운데서 치워 버리자. 누가 알려 주거든 “그 점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시 듣겠소”(사도 17,32) 하고 적당히 넘겨 버리자. 고통이니 배상이니 뭐니 하는 이야기들로 우리를 분심들게 하는 자가 있다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아” 버리면 그만이다. 그런 자는 우리끼리의 안락한 “성 밖으로 몰아내고서는”, 그런 것은 강박신경증적 신앙이니 뭐니 하며 “돌을 던져” 버리자(사도 7,57-58).

 

자고로 신앙인이란 기뻐야만 하며, 즐거워야만 하며, 늘 신이 잔뜩 난 채로 축제와 잔치 분위기 속에서 기도도 하고 미사도 그렇게 거행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게만 하면 우리 신자들, 특히 교회 안의 청년들이 다들 매사에 활기 차고 마음에 여유와 사랑도 한 가득이 되지 않을까? 글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은혜로움’을 입에 달고 살며 해맑은 얼굴을 하고 매사 하느님의 사랑 체험한다고 노래를 부르며 사람 좋은 행세를 하다가도, 누가 조금이라도 내 자존심을 건든다면 그새 히스테릭해져서 온갖 신경질과 기싸움을 걸어대는 신자들이 오죽 한둘인가.

 

신자들이 마음 무거워지는 진리는 워낙에 듣기 싫어하는 고로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갈라 1,10) 전례 때 십자가도 치워 버리고 우리 영혼 가운데 고통의 사람과 고통의 어머니도 내어 쫓아 버렸다. 교회를 그렇게 안락한 온실로 만들었지만, 안타깝게도 교회 바깥 세상은 또 마냥 안락하지가 않다. 신자들이 인생에서 맞닥뜨리는 고난과 역경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그런 고난과 역경을 어떻게 견뎌내고 또 인내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는지라, 오히려 마음 깊이 흠집과 상처만 늘어간다. 상황이 이러하니 근래에 나오는 생활 성가, 청년 성가라 하는 노래들도 어떠한 깊은 묵상과 성찰 없이 무작정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셔!’ ‘하느님은 나를 엄청 아끼셔!’ 하는 류의 자기 암시적 가사들 밖에 없는 게 아닌가. 이런 현상 자체가 신자들이 평상시에 신앙을 통해 무엇 하나 제대로 된 위로도 위안도 얻지를 못하니 ‘애정결핍 신앙’에 시달리고 있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과거에 우리는 고통당하는 그리스도를 보며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라고 탄원했다. 이제 우리는 한껏 추상화되었거나 아니면 예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성화상들을 가져다가 “주님, 위로해주세요!” 하고 징징거리기 바쁘다. 베네딕토 14세는 제단에서 십자고상을 치워버리는 것이 “부패”라고 하였다. 우리 마음에서 십자가 고통을 치워버린다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이 부패하고 있다는 뜻이 아닐까?

예수님, 좀 웃으세요. 보기 흉한 상처들은 가리시구요.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안락함과 편안함만을 제공하는 신앙을 추구하고 또 하느님에 대해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떤 존재가 되든 간에 무조건적으로 즐거워하시고 우리를 반겨 주시는 그런 하느님 상(像)을 그린다. 수도 없이 많은 신자들이, 하느님께서 그저 내게 “그냥 난 너라서 좋다. 다른 건 내게 중요치 않다. 너 죄 있든 없든 난 너만을 사랑한다”라고 말씀해주시길 원한다.

 

 

주님의 고통을 묵상할 때 우리의 고통도 이기게 된다

 

당연하게 내 생계를 부양하는 아버지, 매사에 따뜻한 품으로 안아주기만 하는 어머니의 모습만을 언제까지고 향유하길 원하는 자식들을 두고 우리는 ‘철이 없다’고 말한다. 부모가 겪는 근심과 고통을 헤아리게 되었을 때 비로소 ‘철이 들었다’고들 얘기한다. 상식이다. 그런데 주님 앞에 설 때면 우리는 왜 이리도 몰상식해지는가?

 

어떤 종교가 매사에 피안만을 약속한다면 사기를 치는 것이다. 인생에 고통이 있더라도, 외면하면 그만이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을 몽상가로 만드는 것이다. 반면에 그리스도교, 특히 가톨릭 신앙은 지극히 현실주의이다. 주님께서는 고통 없는 삶, 어려움 없는 삶을 약속하시지도 않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 모든 것을 치워주지도 않으실 것이다. 다만 그것에 십자가라는 이름을 붙여서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마르 8,34)

 

인간이 인생의 슬픔과 고통을 마주할 때 비로소 책임감이라는 것이 싹튼다. 우리가 고통의 사람과 고통의 어머니를 마주하고서 내 죄가 아프게 해드린 것임을 뉘우쳐 슬퍼할 때라야 비로소 더 이상 죄를 짓지 않으려는 결단이 심겨진다. 더 나아가 우리 삶의 고통을 참아 견디며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드리고자 할 때 우리는 진정으로 인간을 짓누르는 모든 고난을 극복하여 참된 평화를 얻는 길을 발견한다.

 

깊이 묵상하지 않음으로써 세심증이 생긴다.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기에 강박이 생긴다. 인내와 배상의 마음이 없기에 그저 우울해지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으로 끝난다. 고통의 사람과 고통의 어머니를 진실로 마주하는 이에게는 세심증도, 강박도, 우울도, 카타르시스도 자리잡을 틈이 없다.

 

헌데 그런 것들이 너무나도 두려운 탓에 우리의 신앙에서 예수 마리아의 고통을 쫓아낸다면, 아, 이 얼마나 애통하고 슬픈 현실인가. 마리아의 종 수도회의 일곱 성인들이 일깨우고자 하였던 그 마음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피어나기를 기도할 일이다.

 

“다른 어는 누구의 사랑에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으로 그 죽음에 참여하셨던”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탁월한 모범을 따라,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콜로 1,24) 하였던 사도 성 바오로의 모범을 따라, 우리도 다가오는 사순 시기를 맞아, 주님의 십자가를 다시금 우리의 제단에, 우리의 마음에 모셔와야 하지 않을까.

 

“도망친 곳에 낙원은 없다”라는 말이 있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하기야 십자가로부터 도망치더라도 어딘가에 다다르기는 할 것이다. 다만 그곳이 단연코 천국은 아니리라.

 


  1. 「로마 미사 경본 총지침」, 117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 “제대 위나 그 주위에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는 십자가를 놓는다.” [본문으로]
  2. 교황 베네딕토 14세, 회칙 Accepimus Praestantium, 1746.7.16., 정경헌 번역. [본문으로]
  3. 성 베르나르도 아빠스의 강론에서,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 성무일도 제2독서에서 발췌. [본문으로]
  4. 교황 레오 13세, 회칙 Iucunda Semper, 1894.9.8., 3항, 정경헌 번역. [본문으로]
  5. 교황 성 비오 10세, 회칙 Ad Diem, 1904.2.2., 12항, 정경헌 번역. [본문으로]
  6. 교황 베네딕토 15세, 서한 Inter Sodalicia, 1918.5.22., 정경헌 번역. [본문으로]
  7. 교황 비오 11세, 회칙 「지극히 자비로우신 구속주」(Miserentissimus Redemptor), 1928.5.8., 12-14항, 정경헌 번역.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