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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펠릭스쿨파 소개

“O felix culpa, quæ talem ac tantum méruit habére Redemptórem!”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저는 천주교 신자 집안에서 태어나 유아 세례를 받고 20년이 넘도록 가톨릭교회의 품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서울대교구 소속 청년입니다. 현재는 강원도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인류의 빛」(Lumen Genitum) 10항은 평신도에 관하여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람들 가운데에서 뽑히신 대사제 주 그리스도께서는(히브 5,1-5 참조) 새 백성이 “한 나라를 이루어 당신의 아버지 하느님을 섬기는 사제들이 되게 하셨다”(묵시 1,6; 5,9-10 참조). 세례 받은 사람들은 새로 남과 성령의 도유를 통하여 신령한 집과 거룩한 사제직으로 축성되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모든 활동을 통하여 신령한 제사를 바치며 그들을 어두운 데에서 당신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불러 주신 분의 능력을 선포한다(1베드 2,4-10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모든 제자는 끊임없이 기도하고 하느님을 함께 찬양하며(사도 2,42-47 참조), 자신을 하느님께서 기쁘게 받아 주실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고(로마 12,1 참조) 세상 어디에서나 그리스도를 힘차게 증언하며, 설명을 요구하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에 대하여 자신들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1베드 3,15 참조).

 

반 세기 전, 이 공의회는 성직자들의 ‘직무 사제직’ 외에도, 평신도들 역시 ‘보편 사제직’을 부여받았음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은 “신자들은 더욱 완전히 교회에 결합되며 성령의 특별한 힘을 받아 그리스도의 참된 증인으로서 말과 행동으로 신앙을 전파하고 옹호하여야 할 더 무거운 의무를 집니다”(「인류의 빛」, 11항). 

 

또한 교회법 제212조 3항에 따르면, “신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학식과 능력과 덕망에 따라 교회의 선익에 관련된 문제에 대하여 자기의 견해를 거룩한 목자들에게 표시하며 또한 이것을 그 밖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도 알릴 권리와 때로는 의무까지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국 교회에서는 평신도가, 특히 청년이 가톨릭교회의 교리와 윤리, 전례와 전통, 교회의 문제들에 관해 심도 있게 대화하고 토론하는 것에 대해 쉬쉬하는 분위기입니다. 성직자든 평신도든, 은연 중에 우리는 그런 것이 평신도의 본분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것보다 하느님 사랑, 하느님과의 관계가 더 중요하다’라는 말을 하기 일쑤입니다. 좋은 말로는 ‘신학교를 가야겠네’라고 하고, 나쁜 말로는 ‘현실을 전혀 모르는 종교 덕후’라고 합니다. 좋은 말이냐, 나쁜 말이냐의 차이일 뿐, 둘 다 ‘너는 일반적인 신자의 범주에 속하지는 않는다’라는 낙인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고 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그 사람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할지도 모른다면 그 사랑한다는 말에 얼마만큼의 무게가 있을까요? 우리는 곧잘 ‘교리는 잘 몰라도 성당 뒷좌석에서 묵주 알을 굴리며 조용히 기도하는 할머니들’을 소환하곤 합니다. 부끄러운 일입니다. 세례를 받기 위해서 교리문답 하나 하나 달달 외우던 시대의 분들을, 충분히 배우고 알 수 있음에도 그러지 않은 우리 자신을 합리화할 때만 찾는 것은 중대한 실례입니다. 

 

한편, 가톨릭 신앙에 대해 더 많이 알고 배우고자 하는 신자들, 특히 청년들 중에서도 잘못된 교리 지식을 공유하고, 심지어 그 잘못된 지식으로 타인을 비판하는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본당에서 가르쳐주는 것 이상으로 신앙에 대해 탐구하려면 직접 책을 사서 읽거나 인터넷을 찾아보며 독학하기 마련인데, 인터넷의 경우 출처를 알 수 없고 신뢰할 수도 없는 정보들이 많이 나돌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사제들까지도, 신앙에 대한 잘못된 정보를 말과 행동으로 전파하기도 합니다. 저 역시도 그랬던 적이 많습니다.

 

동시에, 이러한 ‘제 탓’(mea culpa)은 우리 가톨릭 신앙에 대해서 올바로 알아가게 되는 계기가 된다는 점에서 ‘복된 탓’(felix culpa)이 되기도 합니다. 주님 부활 대축일 전야에 노래하는 부활 찬송에서, 교회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O certe necessárium Adæ peccátum, quod Christi morte delétum est! O felix culpa, quæ talem ac tantum méruit habére Redemptórem!
(참으로 필요했네, 아담이 지은 죄, 그리스도의 죽음이 씻은 죄. 오, 복된 탓이여! 너로써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되었도다.)

 

아담의 죄는 인류가 하느님을 잃고 죄와 죽음의 지배 아래 놓이게 만든 비극 중의 비극이지만, 역설적으로 교회는 바로 그 비극으로 인하여 우리가 그리스도의 위대한 구원을 얻게 되었다고 노래하는 것입니다.

 

“오펠릭스쿨파”라는 이 블로그의 이름은 바로 이 노랫말에서 따왔습니다. 오펠릭스쿨파 블로그는 아담의 죄가 위대한 구세주를 얻게 한 복된 탓이 되었듯이, 우리 모두의 부족함과 불완전함도 마찬가지로 성화와 완덕으로 나아가는 복된 탓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저의 작은 평신도 사도직 실천입니다.

 

저는 여기서 제가 배운 것과 성찰한 것을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당연하게도, 판단은 제 글을 읽는 모든 여러분 각자의 몫입니다.

 

제가 게시하는 글에 대하여 우리는 블로그 댓글이나 오펠릭스쿨파의 기타 SNS를 통해 건전한 의견 교환과 논의를 나누고 토론할 수 있습니다. 잘못된 정보가 있다면 지적해주시길 바라며, 인용했던 교회법 제212조 3항에서 명시하는 바 “신앙과 도덕의 보전과 목자들에게 대한 존경 및 공익과 인간 품위”에 어긋나는 표양을 드러낸다면 형제적 교정을 베풀어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의 부족함을 거룩함으로 이끌어내시는 전능하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평화를 빕니다.

 

 

정경헌 알렉산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