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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적인 문제

성소수자 사목, 사목이 아니라 방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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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목회자들과 함께 퀴어퍼레이드에서 성소수자 축복을 행한 박상훈 신부. (페이스북)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가 사도적 권위로서 “성경과 사도적 전승과 교회 교도권이 증언하고 밝힌 교회의 신앙과 가톨릭 교리의 제시 …… 신앙 교육을 위한 확고한 규범이며 교회의 친교를 위해 유효하고 권위 있는 도구”[각주:1]로 확인한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생명과 사랑의 친밀한 공동체를 이루는 혼인 제도는 창조주께서 제정하셨으며, 그분께 고유한 법을 받았다”[각주:2]라고 가르칩니다. 또한 “혼인 제도 자체와 부부 사랑은 그 본질적 특성으로 자녀의 출산과 교육을 지향하며, 그로써 마치 절정에 이르러 월계관을 쓰는 것과 같다”라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을 재확인합니다[각주:3].

 

이어서 「가톨릭교회 교리서」는 “성적 쾌락은, 부부 일치와 자녀 출산이라는 그 궁극 목적에서 벗어나 그 자체를 위해 추구될 때, 도덕적 문란이 된다. …… 그럴 때에는 ‘도덕 질서가 요구하는, 곧 참된 사랑의 맥락에서 상호 증여와 인간 출산의 완전한 의미를 실현시키는’ 성관계 밖에서 성적 쾌락이 추구되기 때문이다”[각주:4]라고 가르치는데, 이에 따라 동성애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규정합니다.

 

“동성애를 심각한 타락으로 제시하고 있는 성경에 바탕을 두어, 교회는 전통적으로 ‘동성애 행위는 그 자체로 무질서’라고 천명해 왔다. 동성애는 자연법에도 어긋난다. 동성애는 성행위를 생명 전달로부터 격리시킨다. 그 행위들은 애정과 성의 진정한 상호 보완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동성의 성행위는 어떤 경우에도 인정될 수 없다.”[각주:5]

 

이러한 가르침은 “신앙과 도덕에 관하여 교회가 결정적으로 가르치는 모든 교리”에 속하는 것은 물론이요, 더욱이 “성경과 성전[聖傳]으로 전해 오는 하느님의 말씀에 포함된 모든 것들과, 교회가 성대한 판정[sollemni iudicio]이나 통상적 보편 교도권으로써[ordinario et universali magisterio] 하느님께로부터 계시된[divinitus revelate] 믿을 교리”[각주:6]에 해당됨이 확실합니다. 즉, 모든 가톨릭 신자는 이러한 교리에 대해서 “완전하고 돌이킬 수 없는 성질의 동의”[각주:7]가 요구되며, “누구라도 이 진리를 고의적으로 부인하는 사람은 가톨릭 교리의 진리를 거절하는 입장에 놓이게 되며 따라서 더 이상 가톨릭교회와의 완전한 친교에 있지 않습니다.”[각주:8] 뿐만 아니라 그 가르침이 신앙의 유산을 그대로 반영하는 만큼 “이단의 책임”에도 떨어지게 될 수 있을 것입니다.[각주:9]

 

스스로 주님을 믿고 바라고 사랑하는 가톨릭 신자라 자처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교회와의 친교가 깨지고 이단자가 되는 것은 두렵고 소름끼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습니다.

 

 

국내 성소수자 사목의 발흥

 

2021년 5월 2일 차별금지법 이슈에 뒤따른 염수정 추기경의 생명주일 담화문은 당시 논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염 추기경은 젠더 이데올로기와 동성애 및 동성혼에 반대하고, 가톨릭교회의 성 윤리를 재확인했습니다. 이는 진보적인 인사들에게 비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특히 정의당의 장혜영 의원이 나서서 “교회가 사회의 빛과 소금이 못 될망정, 차별과 혐오로 인한 소수자들의 상처에 소금 뿌리는 일”이라고 비판했던 바 있습니다. 정치인까지 나서서 반발할 정도였으니, 그 여파가 결코 작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 이후로, 부쩍 예수회를 중심으로 ‘해명하는 사제들’이 나타났습니다. 불과 이틀 뒤, 서강대학교 총장 심종혁 루카 신부가 성소수자 사목으로 유명한 미국 예수회의 제임스 마틴 신부의 책 「다리 놓기」를 번역하여 소개했습니다. 얼마 안 가 예수회 인권연대연구센터 소장 박상훈 신부역시, 염 추기경의 담화문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글을 성소수자 신앙인 당사자들과 그 가족, 지인들이 보고 얼마나 상처받고, 존엄이 훼손되고 자신의 가치가 유린당하는 느낌을 받을까 생각이 들었다.”

 

교회 내부의 비판 역시 존재했다지만, 가톨릭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 분명했으므로 그러한 비판도 결국은 찻잔 속의 태풍으로 끝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2021년 말 정순택 베드로 대주교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착좌하고, 동시에 일종의 ‘시노달리타스 붐’이 일어난 이래 상황이 역전되었습니다. 주목할만한 이벤트는 서울대교구 시노드가 주도한 성소수자 모임이었습니다.

 

정순택 대주교의 의견이 반영되어, 2022년 3월에 상기한 박상훈 신부를 포함한 사제들과 성소수자 및 성소수자 부모 간에 모임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자리에서 성소수자들은 교회 안에 존재하는 성소수자 혐오를 문제 삼았지만, 동시에 가톨릭교회가 동성애와 동성혼을 단죄하고 반대하는 것 역시 문제 삼았습니다.

 

특히 성소수자 측의 의견 중에는 “지난해 4월 염수정 추기경께서 ‘인간의 존엄성에 근거한 부당한 차별의 반대를 ‘동성혼’ 등을 용인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도 안 된다‘고 말씀하신 것이 천주교인 성소수자들에게 큰 상처였다”며, 직접적으로 염 추기경의 담화문을 겨냥하는 의견도 있었습니다.

 

이 일을 계기로, 성소수자 사목은 한국 교회 안에서 점차 가시적인 형태를 띄게 되었습니다. 2022년 7월, 천주교 사제, 수도자와 평신도 집단이 서울 퀴어퍼레이드 현장에 주도적으로 참여했습니다.

 

2022년 9월부터는 평신도 단체 ‘아르쿠스’ 주도로, 서울에서 한국 교회 사상 최초로 ‘성소수자 미사’가 정기적으로 거행되고 있습니다. 박상훈 신부, 그리고 앞서 언급한 성소수자 시노드 모임에 참여했던 현대일 루카 신부가 이 미사를 공동집전한 바 있는데, 현대일 신부는 미사 중 “시노드 모임 할 때 한 달에 1번씩 오늘과 같은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었는데, 정말로 기꺼이 이렇게 자리가 마련돼 감사하다”며, 시노드 모임과 성소수자 미사 사이에 연관성이 있음을 언급했습니다.

 

이런 움직임이 일선 본당에서 발현된 사례로는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던 작년 5월 28일, 인천교구 은행동예수성심성당에서 마련된 성소수자 초대 특강을 들 수 있습니다. 이 자리에 선 성소수자 당사자 역시 처음에는 자신의 성 정체성을 숨겨야 했던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하지만, 결국에는 가톨릭교회 교리 자체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피력합니다. 그는 “성소수자는 비정상적이고, 자연법을 거스르는 존재, 죄인이다”라는 교리를 문제 삼았습니다. 본 자리에 참여한 예수회의 김정대 프란치스코 신부는 “우리 사회는 특히 성을 행위로만 본다. 그리고 성소수자를 공격할 때, 그런 성적 행위로 공격한다”라고 발언했습니다.

 

 

교회를 따를 의지가 없는 이들에 대한 사목적 배려

 

이 성소수자 당사자들은 얼핏 보면 성소수자에 대한 교회와 사회의 부당한 차별, 물리적이거나 언어적인 폭력에 반대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동성애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 그 자체를 공격하고 반대하고 있으며, 교회의 도덕적 가르침을 실천할 의지가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이들은 교회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는 사목자를 두고 ‘교회의 가르침에서 벗어났다’는 거짓 선동을 공공연히 펼치기도 합니다.

 

상기한 정기 월례 성소수자 미사를 주도하고 있는 “가톨릭” 성소수자 앨라이 단체 아르쿠스는 작년 12월 대림1주일 서울대교구 주보에 실린 가톨릭대학교 생명대학원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님의 기고문에 반발하는 성명문을 자신들의 공식 SNS 계정에 공개했습니다.

 

작년 대림1주일 서울대교구 주보에 실린 박은호 그레고리오 신부의 기고문. (서울대교구)

 

 

아래는 아르쿠스 성명문 전문입니다.


대림1주 서울주보에 실린 특별기고에 대한 가톨릭성소수자앨라이아르쿠스의 입장

 

예수님께서 이렇게 물으신다. “누가 내 어머니고 누가 내 형제들이냐?”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사람이 내 형제요 누이요 어머니다.” (마태 12,46-50 참조)

 

지난 11월 바티칸 신앙교리부가 발표한 문헌에서 “트랜스젠더가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수 있고, 세례성사의 대부모가 될 수 있다.“고 밝혔다. 바티칸은 동시에 트랜스젠더의 세례성사 혹은 세례성사에서 트랜스젠더 대부모의 조건을 분명히 명시했다. 바로 ‘신자들 안에 공공연한 추문이나 혼란을 야기할 위험이 낮을 경우’에 트랜스젠더가 세례성사를 받거나 대부모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023년 대림1주 서울주보에 실린 특별기고는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와 차별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정당화하고 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트랜스젠더의 세례성사가 자칫 ’호르몬 치료나 성확정 수술이 갖고 있는 교리적 부당함‘을 승인하는 것처럼 보이면 안된다는 주장은 명백히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이다. 세례성사를 통해 가톨릭 신앙을 갖고 살아가길 원하는 트랜스젠더의 양심은 호르몬 치료나 성확정 수술을 선택한 행위와 별개며, 어떤 잘못에 대한 예측이 ’의도의 진정성‘을 손상시킬 수는 없다. 바티칸 신앙교리부는 같은 문헌에서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를 인용하며 ‘설령 어떤 이가 죄에 넘어갈 지라도’ 트랜스젠더의 세례성사가 그런 승인으로 비춰지는 것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바티칸 신앙교리부는 두 교부의 가르침은 물론,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도 함께 인용했다. “성사의 문은 어떠한 이유로든 닫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 특히 그 자체가 문인 세례성사가 그러합니다. 교회는 세관이 아닙니다. 교회는 저마다 어려움을 안고 찾아오는 모든 이를 위한 자리가 마련되어 있는 아버지의 집입니다.“ (교황 프란치스코, 「복음의 기쁨」, 제47항 참조)

 

혐오와 차별은 하느님의 언어가 될 수 없으며, 교회는 이를 교묘한 말로써 교회의 가르침으로 포장하며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 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런 논리는 트랜스젠더가 아니더라도 교회 공동체에 속한 누구든지 어떤 이유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기에 위험하다.

 

교회에 축복을 청하는 성소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이 지닌 선한 양심에 바탕을 두고 교회가 가능함 범위 안에서 베풀어 줄 수 있는 사목적 배려다. 성소수자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소중한 생명이며, 그 창조에는 오류가 있을 수 없다. 하느님을 믿어 그 뜻을 실천하려는 트랜스젠더는 세례성사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 속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는 선한 양심의 결과는 교회 안에서 공공연한 추문이나 혼란을 야기할 위험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우리의 신앙 안에서 성찰한다. 

 

이에 성소수자들에 연대하는 가톨릭교회의 평신도들은 서울주보에 실린 이와 같은 글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 동시에 우리는 교회에 성사를 집전하는 사제가 세례성사를 청하는 트랜스젠더의 양심에 비추어 그에게 세례성사를 베풀지 판단하기를 요청한다.

 

2023년 대림2주 인권주일•사회교리주간을 맞이하여 

 

가톨릭성소수자앨라이 아르쿠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지리멸렬하면서도, 어떤 점에서는 비열한 성명문입니다. 

 

 

아르쿠스 성명문은 박은호 신부님의 기고문을 “트랜스젠더를 향한 혐오와 차별을 교회의 가르침으로 정당화”하는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트랜스젠더의 세례성사가 자칫 ’호르몬 치료나 성확정 수술이 갖고 있는 교리적 부당함‘을 승인하는 것처럼 보이면 안된다는” 박 신부님의 “주장은 명백히 성소수자를 향한 혐오와 차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에 대한 반박 내용에 신앙교리부의 문헌 내용을 인용합니다. 박 신부님께서 교황청의 가르침을 왜곡하여 자신의 혐오와 차별을 교회 가르침인양 덧씌워 잘못 가르쳤다는 인상을 주려는 의도가 다분합니다.

아르쿠스의 성명문이 ‘의도의 진정성’ 운운하는 대목은 신앙교리부 문헌의 1번 문답 “트랜스젠더가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까?”에 실린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은 이러합니다. 공개적인 추문이나 혼란의 위험이 없다면 트랜스젠더도 세례를 받을 수 있습니다. 다만 트랜스젠더 영세자가 처한 “객관적인 도덕적 상황에 대한 의심이나 그 또는 그녀의 은총을 향한 주관적인 준비에 대한 의심”이 있을 때 고려해야 할 다음의 사항을 본문은 언급합니다.

 

“중죄에 대한 회개 없이 성사를 받을 때, 배령하는 사람은 인호를 받으나 성화 은총은 받지 못합니다. …… 사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은총을 가로막는 장애가 사라질 때, 올바른 준비 없이 세례를 받은 사람 안에서 인호 그 자체가 ‘은총을 받게 하는 즉각적인 원인이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히포의 성 아우구스티노는 사람이 죄에 떨어질지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분께서 세례 안에서 주신 인호를 파괴하지 않으시고, 죄인을 찾으시며, 그 인호가 각인되어 있는 자를 당신의 소유로 식별하신다고 말함으로써 이러한 상황을 상기합니다.”

 

아르쿠스의 성명문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와 성 아우구스티노를 인용한 내용이 위의 것입니다. 이 다음에 신앙교리부는 아르쿠스 성명문에도 나오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했습니다. 1번 문답은 다음과 같이 끝맺어집니다.

 

“그렇다면 사람의 객관적인 도덕적 상태나 은총을 향한 주관적인 준비에 대한 의심이 남아있을 때라 할지라도, 하느님의 성실하심이 지닌 무조건적인 사랑의 이러한 측면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은 죄인과 더불어 되돌릴 수 없는 계약을 자아낼 수 있고, 항상 발전할 수 있으며, 예측할 수 없는 것입니다.

 

정개의 목적이 참회에서 완전히 명백한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을 때조차 이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새로이 [죄에] 떨어지는 일에 대한 예측가능성이 ‘목적의 확실성을 훼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는 영세가 암시하는 모든 바를 완전히 살아낼 것을 언제나 요청하여야 하며, 이는 반드시 그리스도교 입문의 여정 전체 안에서 이해되고 전개되어야 합니다.”

 

요약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① 회개 없이 세례를 받는다면 세례가 주어야 할 성화 은총을 받지 못하나 다만 인호는 받는다

 

② 영세자가 다시금 죄에 떨어질 법하다 하더라도, 그 자체로 영세자의 정개가 불확실한 것으로 간주되는 것은 아니다

 

③ 영세자가 당장 세례를 통해서 성화 은총을 받지 못한다 한들 여전히 인호가 남으며 나중에라도 제대로 참회하면 세례가 주는 성화 은총을 받을 수 있다

 

④ 그러므로, 영세자를 섣불리 세례에서 배제하면 안 된다 (당연히 사목적 신중함이 요구되는 일이며, 세례를 줄 수 없는 경우는 여전히 존재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게 어디까지나 ‘고려 사항’입니다. 이 내용이 박 신부님의 기고문을 반박하지 않음 역시 자명한 사실입니다.

 

아르쿠스 성명문은 “혐오와 차별 …… 교회는 이를 교묘한 말로써 교회의 가르침으로 포장하며 혐오와 차별을 정당화 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교묘한 말로써 교회의 가르침으로 포장”하는 게 누구입니까? 박 신부님입니까? 아르쿠스입니까?

 

성전환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일임은 아르쿠스가 자랑스레 인용하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가르침에 따라서도 자명한 일입니다. 교회가 성전환을 용납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자들에게 오해되는 것이 곧 신앙교리부 문헌에서 말하는 ‘추문과 혼란’에 해당함 역시 명명백백합니다.


​“세례성사를 통해 가톨릭 신앙을 갖고 살아가길 원하는 트랜스젠더의 양심은 호르몬 치료나 성확정 수술을 선택한 행위와 별개”입니까? 아닙니다. 가톨릭 신앙은 성전환을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가톨릭 신앙을 갖고자 하는 트랜스젠더에게 이는 시련과 어려움이 될 수 있지만, “인간의 나약함과 삶의 다양성을 이해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는 실재적 측면을 따로 떼어 보려는 이념을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각주:10]입니다.

 

물론 이는 개별 사목자의 너른 사목적 배려를 원천봉쇄하지 않습니다. 신앙교리부가 명시한 고려 사항에 따라, 트랜스젠더 영세자들에 대한 더 세심한 사목적 배려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 한들 교회가 성전환을 정당화할 수는 없는 것이고 정당화한다는 인식을 신자들에게 주어서도 안 됩니다. 이는 교황께서 승인하신 분명한 교도권의 가르침이며, “교황의 유권적 교도권에 대하여는, 비록 교좌에서 말하지 않을 때에도, 특별한 이유로 의지와 지성의 이 종교적 순종을 드러내어야 한다”[각주:11] 하였습니다.

 

그리고 박 신부님께서는 이를 쉬운 말로 훌륭히 풀어내셨습니다.

아르쿠스가 말하길,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려는 선한 양심의 결과는 교회 안에서 공공연한 추문이나 혼란을 야기할 위험으로 나타나지 않을 것임을 우리의 신앙 안에서 성찰한다”라 하니, 이는 분명 좋은 말입니다. 그러나 한국 교회에서 성소수자에 대한 더 깊은 사목적 배려를 요청하고 실천에 기여하고자 한다는 대표성을 지니는 저 아르쿠스조차, 온갖 수사학을 동원하여 교회의 가르침을 지리멸렬하게 찢어 붙여가며 혼란을 주고,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제의 가르침에 맹비난을 쏟아 부으니 이보다 더 한 추문이 또 어디있겠습니까?

박은호 신부님에 대한 “가톨릭” 성소수자 및 지지자들의 반응

 

이 외에도 아르쿠스는 적극적으로 동성애의 도덕적 정당성과 젠더 이데올로기를 증진하는 퀴어퍼레이드에 참여하면서, 주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 성 요셉, 그 외 다른 성인 성녀들의 모습에 LGBT 깃발을 합성한 조잡한 그림을 제작하여 나눠줍니다. 심지어는 고양이한테 후광을 덧씌운 그림까지 있습니다. 

아르쿠스 측 퀴어퍼레이드 배포물. (가톨릭 앨라이 아르쿠스 페이스북 페이지)

 

그러나 수많은 사제들이 옳은 말을 하고 공격을 당하는 동료 사제를 옹호하기 위해 나서지는 못할 망정, 적극적으로 이들과 협력하며 미사 거행을 비롯한 활동을 진행해 오고 있습니다. 지난 2월 12일, 글라렛 선교 수도회 이승복 라파엘 신부는 이들을 위한 미사 거행 이후 레즈비언 커플 두 쌍을 축복했고, 아르쿠스는 이를 이슈화시켰습니다.

 

이 가운데 한 쌍은 2013년 캐나다에서 동성혼을 한 관계입니다. 그 중 한 명인 크리스티나는 “가톨릭” 레즈비언 단체 ‘알파오메가’ 창립자이자 아르쿠스의 공동 창립자로서, 캐나다의 한 경당에서 전직 예수회 사제가 혼인성사를 모방하여 “결혼식”을 치루어주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상기한 염수정 추기경의 담화문을 두고 “안타깝다”며, “이성 간 결혼만 신성하고 동성 간 결혼은 죄로 여기는 게 하느님 뜻인지 묻고 싶다”고 말합니다.

 

더불어 “결혼을 ‘남성과 여성 간의 결합’으로 한정하고 동성 간 혼인성사는 불가하다는” 교회의 가르침이 “바티칸의 성직주의적 벽”이라며―대체 어디가 성직주의인지는 묻지 맙시다. 우리는 이들의 주장을 접할 때 이성을 사용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가톨릭교회는 언제까지 혼인에 대한 전통을 고수하며 성사혼에서 동성 커플을 배제시킬까? 동성애자도 하느님의 자식이고 차별하면 안 된다면서 동성 혼인은 안 된다는 건 모순이다”라고 주장합니다.

 

교황청 신앙교리부의 축복의 사목적 의미에 관한 선언 「간청하는 믿음」은 비정상적 상황에 있는 커플 및 동성 커플에 대한 축복을 두고 “이 경우에 주어지는 축복은 …… 자신의 신분에 대한 합법화를 주장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삶과 관계 안에서 참되고 좋으며 인간적으로 유효한 모든 것이 성령의 현존으로 풍요로워지고 치유되며 고양되기를 간청하는 사람들에게 하느님에 의하여 하강하는 복의 간구이기도 한 것”[각주:12]이라고 가르치며, “사목적 신중함과 지혜는, 성직자가 신자들 사이의 심각한 추문이나 혼란을 피하면서 결코 혼인과 비교될 수 없는 결합 안에서도 주님과 그분의 자비에 자신들을 의탁하고 그분의 도움을 간청하며 그분의 사랑과 진리의 계획을 더 잘 이해하도록 인도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의 기도에 동참하도록 제안할 수 있다”[각주:13]라고 단언합니다.

 

“자신의 신분에 대한 합법화를 주장하지 않는 사람들”이었습니까? “성직자가 신자들 사이의 심각한 추문이나 혼란을” 피했습니까? “사목적 신중함과 지혜”가 있었습니까?

 

“너희는 말할 때에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요.’ 할 것은 ‘아니요.’라고만 하여라. 그 이상의 것은 악에서 나오는 것이다”(마태 5,37)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교리의 발전과 부패

 

이러한 성소수자 사목의 가장 큰 문제점은 가톨릭 신학적인 성찰과 기반이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성소수자 사목에 가담하는 이들 중 절대 다수의 사목자들은 ―교회의 가르침을 거스르는― 성소수자의 의견을 일방적으로 경청 및 수용할 뿐입니다. 그러고서는 역으로 교회의 가르침이 바뀌어야 한다고까지 주장합니다. 상기한 심종혁 신부, 박상훈 신부를 비롯한 국내외 대부분의 적극적인 성소수자 사목 성직자들이 이런 양상을 띄고 있습니다.

 

특히 박상훈 신부는 동성애 성행위를 단죄하는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을 들어, “인간의 권리에 피해를 주거나 침해하는 행위를 교회가 하고 있다는 것은 모순 …… 현실을 보자면 동성애에 관한 새로운 데이터가 많이 나타났는데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전근대적이고 진전이 없다”고까지 말합니다.

 

해외의 경우는 말할 것도 없습니다. 독일의 게오르크 베칭 주교는 성적인 사랑이 혼인 관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한다는 교회의 가르침을 두고 말합니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교리서 내용을 어느정도 변경해야 합니다. 섹슈얼리티는 하느님의 선물이지 죄가 아닙니다.” 유럽 주교회의 의장 장클로드 올러리슈 추기경은 동성애를 단죄하는 교회의 가르침을 더러 “저는 이것이 틀렸다고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라인하르트 마르크스 추기경은 “동성애는 죄가 아닙니다”라고 단언합니다. 이들 모두는 교회의 교리가 바뀌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2024-07-22 업데이트]

 

장클로드 올러리슈 추기경은 동성애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이 틀렸다는 입장을 밝힌 약 반 년 뒤인 2022년 8월, “교회의 전통을 완전히 믿는다”며, 다음과 같이 자신의 생각을 간접적으로 철회했습니다. “저는 어떠한 교리도 변경하는 데 찬성하지 않습니다. 저는 교회가 모두에게 있어서 진정으로 환영받는다고 느낄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에 찬성합니다.”

 

확실히,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영원히 고정불변한 채로 남지 않습니다. 교리는 발전합니다. 하지만 발전한다는 것이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해체하고 폐기해도 좋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계시 헌장은 “사도들에게서 이어 오는 이 성전[聖傳]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교회 안에서 발전한다”[각주:14]고 선언했지만, 동시에 해당 가르침은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의헌장 Dei Filius 제4장의 내용을 각주로 삼습니다.

 

“다만 신앙이 이성 위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비를 계시하시고 신앙을 불어 넣으시는 바로 그 하느님께서 인간의 영혼에 이성의 빛을 부여하셨기 때문에 신앙과 이성 사이에는 진정한 불화가 존재할 수 없으며,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스스로를 부인하실 수도 없고 진리가 진리와 모순될 수도 없다. 다만 이러한 모순의 헛된 양상은 주로 신앙의 교의가 교회의 정신에 따라 이해되고 해석되지 아니하였거나, 삿된 의견이 이성의 결정으로 간주되는 데서 비롯된다. 따라서 ‘우리는 신앙에 의하여 비추어진 진리에 반하는 모든 주장은 전적으로 거짓이라고 정의한다’[제5차 라테란 공의회].

또한, 가르치는 사도적 의무와 함께 신앙의 유산을 지키라는 명령을 받은 교회는 하느님의 섭리로부터 “아무도 사람을 속이는 헛된 철학으로 여러분을 사로잡지 못하게”[콜로 2,8 참조] “사이비 지식”[1티모 6,20]을 금지할 권리와 의무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모든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은 신앙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으로 알려진 것이나, 특히 교회가 단죄한 것이라면, 그러한 종류의 의견을 학문의 정당한 결론으로 옹호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진리에 대하여 삿된 양상을 보여주는 오류로 간주할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

신앙과 이성은 결코 서로 상반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상호 도움을 준다. 올바른 추론이 신앙의 근거를 증명하고 그 빛에 비추어 천상 것들에 대한 지식을 완전하게 하여주는 동시에 신앙은 이성을 오류로부터 해방하고 보호하며 [이성에게] 다방면의 지식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 하느님께서 계시하신 신앙의 교리는 인간 정신이 완성하도록 철학적 창안물로 전승되어진 것이 아니라, 신실하게 보호하고 무류하게 해석하도록 그리스도의 정배[교회]에게 천상 유산으로 맡겨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룩한 어머니 교회가 한 번 선언한 거룩한 교의에 대한 이해는 영구히 유지되어야 하며, 더 깊은 이해라는 미명 아래 [교의의] 의미에서 퇴보하는 일은 결코 있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 개인의 이해, 지식, 지혜가 모든 사람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한 사람 그것이 교회 전체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시대와 세기가 나아감에 따라 강하게 성장하고 진보하되, 오로지 그 자체의 유[類], 즉 같은 교의 안에서 같은 지각과 같은 이해로만 이루어지게 할 것이다’[레랭의 빈첸시오, Commonitorium, 23, 3].”[각주:15]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성이 신앙에 관련된 지식을 완전하게 해준다―즉 발전시킨다―고 천명했지만, 삿된 의견이나 그릇된 추론으로 인해 거짓과 오류로 귀결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데 더 많은 지면을 할애했습니다.

 

예컨대 “우리에게는 하느님 아버지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 …… 또 주님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이 계실 뿐입니다”(1코린 8,6)라는 사도 성 바오로의 고백과 비교하면,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 빛에서 나신 빛, 참 하느님에게서 나신 참 하느님으로서 …… 성부와 한 본체로서”라는 수백 년 이후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의 고백은 분명 문자적으로는 완전히 동일하지 않으나 그 사이에 모순이 없고 연속성만이 있는 정당한 발전과 지당한 이성적 추론의 귀결입니다. 그러나 꼭 고대의 이단자 아리우스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단순히 피조물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삿된 오류일 뿐입니다. 

 

가톨릭 교리서 2358항에서 동성애 성향을 두고 “객관적 무질서”(objective disorder)라는 용어로 지칭한 것을 수정해야한다는 성소수자 사목 진영의 제안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엄밀한 철학적 의미에서 쓰인 “무질서”(disorder)라는 단어는, 현대 사회에서는 정신 질환이나 장애를 지칭하는 것으로 오해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이런 경우, 레랭의 성 빈첸시오가 말했듯이 “같은 교의 안에서 같은 지각과 같은 이해로” 발전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 성행위와 동성혼에 대한 도덕적인 정당화가, 그것을 단죄하고 결연히 반대하는 기존의 가톨릭 교리와 어떻게 연속성을 이루고 또 어떻게 그것을 더 분명하게 설명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아무런 가톨릭 신학적 성찰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는 해외의 성소수자 사목 역시 마찬가지로 안고 있는 문제입니다. 시대 정신이 바뀌었기 때문에, 또는 자신들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무작정 바뀌어야 한다는 것은 이성도 추론도 아닙니다.

 

마냥 경청해주고 수용해주기만 하는 양상 역시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목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영혼의 구원으로 인도하는 데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람이 죄를 끊고 완전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는 것이 불가피합니다. 

 

 

부정적인 전망

 

성소수자 사목을 필두로 한 동성애 인정은, 가톨릭교회 내 보혁 갈등을 부추기는 주된 이슈 중 하나입니다. 최근 「간청하는 믿음」을 둘러싼 논란에서도 그러한 양상이 가시화되었습니다. 한편, 한국 교회에서는 성소수자 사목에 관한 문제가 비교적 조용한 편입니다. 일부 신자들 사이에서 불평 불만이 돌고 돌 뿐, 점진적으로 가시화되고 확장되어 가는 성소수자 사목에 비해서, 그에 대한 비판 여론은 좀 처럼 수면 위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이러한 현황에 대해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직후인 1967년 국내의 전례 변화에 대한 하느님의 종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의 평을 되새겨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들 사목자들은 공의회 이래 버릇처럼 ‘교회는 쇄신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또 그 때마다 ‘공의회 정신에 따라서’라는 단서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지만, 막상 ‘그 이른바 공의회 정신이 무엇이냐’고 묻기라도 한다면, 말문이 막힐 정도로 스스로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다.

 

…… 우리 나라 교회에도 공의회의 영향이 전무한 바 아니다. 특히 전례면에서는 불과 몇 해 사이에 금석지감을 금할 수 없을 만큼 격심한 변화가 있었다. 이런 변화는 앞으로도 더욱 더 커져갈 것이다. 또한 우리 나라에서는 새 전례의 실시에 관한 한, 다른 선진국 교회에 비해 뒤지지 않을 만큼 순조롭다고 자부할 수도 있다. 용어번역상의 애로 등 난관이 없는 바 아니지만, 적어도 서구에서는 아직도 있다는 Una Voce(라틴어 고수주의) 같은 역조에 부딪힌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는 한국 교회가 그만큼 공의회 정신에 의해 쇄신되어 가고 있기 때문이라 말할 수는 없다는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새 전례가 한국 교회에서 별 큰 마찰없이 비교적 순조로이 도입 실시될 수 있었다는 것은, 한국 교회의 정신과 지식 수준이 평균 이하이고, 그 때문에 맹목적인 순응에 불과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각주:16]

 

과연 하느님의 종다운 지당한 통찰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당시 사목자들이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정신”을 떠들지만 정작 그 정신이 무언가 하면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듯이―사실 이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이제는 “시노드 정신”을 떠들지만 그 정신이 무엇인가 하면 역시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교의와 교리에 부합하든 부합하지 않든 일단 아무 이야기나 경청하고 수용하고 보는 것이 시노드 정신이라고들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그리고 어김없이 평신도들은 무턱대고 좋은 것이겠거니, 옳고 그름을 따지는 의식이 없이 따릅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김 추기경의 평을 다시 한 번 인용하겠습니다.

 

“한국 교회의 정신과 지식 수준이 평균 이하이고, 그 때문에 맹목적인 순응에 불과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느님의 종 김수환 추기경. (Wikipedia)



어떻게 개선할 것인가

 

성소수자들을 위한 특별한 사목이 필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은 한국 사회에서 여전히 지나친 편견의 대상이 되어 있고, 개개인에 따라서는 차별과 폭력에 시달리기도 합니다. 이런 점에서 그들이 본당 사제에게 자신의 상태를 터놓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은 분명 교회가 성찰해야 할 지점입니다.

 

하지만 사목에도 한계가 있음을 자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교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으로”[각주:17] 부름을 밭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사목도 불가능합니다. 결코 정당화될 수 없는 성적인 결합과 관계를 유지하길 고집하는 이들은 사목의 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덧붙여, 김정대 신부의 “우리 사회는 특히 성을 행위로만 본다. 그리고 성소수자를 공격할 때, 그런 성적 행위로 공격한다”라는 비판은, 교회에 대해서도 타당한 점이 있으나 성소수자 당사자들에게도 돌릴 필요가 있다는 점 역시 지적해야 하겠습니다. 성적 지향의 경우, 그것이 역사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특별한 맥락을 지닌다 하더라도, 결국은 개인의 성적 기호와 행위일 따름입니다. 그러한 성적 기호와 행위에 대한 반대를 자신의 인간 존엄성 자체에 대한 반대로 받아들인다면, 역으로 그들 역시 자신의 존재를 성적 행위만으로 규정짓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일입이다.

 

예컨대 혼외 관계 및 자위행위, 그리고 방탕에 대한 교회의 단죄는 수많은 청년 신자들에게 어려움이 되고 있지만, 이 때문에 자신의 인간 존엄성을 침해당한다고 느끼는 신자는 없습니다. 성소수자를 위한 사목을 주장하면서 정작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숙고해보는 사목자가 전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교회의 사목자들은 그들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하는 것을 사목의 목적으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과정에서는 중요할 수 있어도 결코 목적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존재로 이끌어 나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목이 아니라 그저 방치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성경에서 말하기를 하느님께서 회개하지 않는 동성애자들을 방치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이 창조된 때부터, 하느님의 보이지 않는 본성 곧 그분의 영원한 힘과 신성을 조물을 통하여 알아보고 깨달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변명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알면서도 그분을 하느님으로 찬양하거나 그분께 감사를 드리기는커녕, 오히려 생각이 허망하게 되고 우둔한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 그리하여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마음의 욕망으로 더럽혀지도록 내버려 두시어, 그들이 스스로 자기들의 몸을 수치스럽게 만들도록 하셨습니다. …… 그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버리고, 창조주 대신에 피조물을 받들어 섬겼습니다. 창조주께서는 영원히 찬미받으실 분이십니다. 아멘. 이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수치스러운 정욕에 넘기셨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여자들은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자연을 거스르는 관계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로 여자와 맺는 자연스러운 육체관계를 그만두고 저희끼리 색욕을 불태웠습니다. 남자들이 남자들과 파렴치한 짓을 저지르다가, 그 탈선에 합당한 대가를 직접 받았습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 모시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분별없는 정신에 빠져 부당한 짓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로마 1,20-28)

 

「간청하는 믿음」은 동성 커플에게 주어지는 축복이 조력 은총(gratia actualis)을 부여한다고 설명합니다.[각주:18] 이는 회개의 시작을 위한 하느님의 개입입니다.[각주:19] 안타깝게도 우리는 ‘불가항력적 은총’을 믿는 칼빈주의자가 아닙니다. 그러한 은총이 부여되더라도 사람이 자유로이 그것을 거절한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하느님의 저주가 방치라면, 스스로 은총을 거절하겠다고 단언하는 이들에 대한 축복은 저주와 무엇이 다릅니까?

 

“자 이제, 사제들아, 이것이 너희에게 내리는 계명이다. 너희가 말을 듣지 않고, 명심하여 내 이름에 영광을 돌리지 않으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리고 너희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버리겠다. ─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 ─ 사실 나는 이미 너희의 축복을 저주로 바꾸어 버렸다. 너희가 명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말라 2,1-2)

 

우리는 무신론자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하느님을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토록 중대한 문제를 뒤로 미루거나,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데 늑장을 부릴 수야 없지 않겠습니까?  

 

필연적으로 후회하게 될 수밖에 없을 그 날이 되면 모든 것이 너무 늦을 것입니다….

 


 

  1.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령 「신앙의 유산」(Fidei Depositum), 1992.10.11., 4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본문으로]
  2. 「가톨릭교회 교리서」, 1660항. [본문으로]
  3.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목 헌장, 48항, 「가톨릭교회 교리서」, 1652항에서 인용. [본문으로]
  4. 「가톨릭교회 교리서」, 2351-2352항. [본문으로]
  5. 「가톨릭교회 교리서」, 2357항. [본문으로]
  6. 교황청 신앙교리성, 「신앙 선서」(Professio Fidei), 1989.3.13.,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본문으로]
  7. 교황청 신앙교리성, Doctrinal Commentary on the Concluding Formula of the Professio fidei, 1998. 6. 29., 8항, ofelixculpa.com 번역. [본문으로]
  8. 교황청 신앙교리성, Doctrinal Commentary on the Concluding Formula of the Professio fidei, 1998. 6. 29., 6항, ofelixculpa.com 번역. [본문으로]
  9. 교황청 신앙교리성, Doctrinal Commentary on the Concluding Formula of the Professio fidei, 1998. 6. 29., 5항, ofelixculpa.com 번역. [본문으로]
  10.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사랑의 기쁨」(Amoris Laetitia), 2016.3.19., 56항,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본문으로]
  11.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 헌장, 25항. [본문으로]
  12. 교황청 신앙교리부, 축복의 사목적 의미에 관한 선언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 2023.12.18., 31항, 이규용 번역. [본문으로]
  13. 교황청 신앙교리부, 축복의 사목적 의미에 관한 선언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 2023.12.18., 30항, 이규용 번역. [본문으로]
  1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계시 헌장, 8항. [본문으로]
  15.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교의헌장 Dei Filius, 제4장, ofelixculpa.com 번역. [본문으로]
  16. 「사목」, 제2호, 김수환, 1967.8., p.8. [본문으로]
  17. 「가톨릭교회 교리서」, 2013항. [본문으로]
  18. 교황청 신앙교리부, 축복의 사목적 의미에 관한 선언 「간청하는 믿음」(Fiducia Supplicans), 2023.12.18., 31항, 이규용 번역. [본문으로]
  19. 「가톨릭교회 교리서」, 2000항.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