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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성미술 속 삼위일체가 드러내 주는 성부 성자 성령과 우리의 관계

휴고 반 데르 고스, 삼위일체 제단화, 약 1478-1479년경, 벨기에, 現 에든버러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그리스도교가 그 아주 이른 시작부터 예수 그리스도를 단순한 윤리적 스승이나 일개 예언자, 하느님께서 파견하신 사자 정도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때때로 이 사실에 도전하는 학자들이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학자들 사이에서 거진 1세기 중반에 기록된 것으로 합의된 사도 성 바오로의 서한들은 이미 사도들의 시대에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과 같은 분으로 여겨졌음을 드러내 주고 있다.

 

예컨대 성 바오로는 필리피인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당시 교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찬가의 내용을 이렇게 인용한다.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께서도 그분을 드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분께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의 이름 앞에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이 다 무릎을 꿇고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모두 고백하며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드리게 하셨습니다. (필리 2,6-11)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신 분,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라는 구절을 두고도 두 말할 것이 없겠지만, 그 이름 앞에 모든 자들이 무릎을 꿇고 주님이심을 고백하는 분이시라는 구절은 더욱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이것이 이사야 예언서에서 하느님께 해당되는 표현을 인용한 것이기 때문이다.[각주:1]

 

사도들을 포함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이심을 분명히 믿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하느님은 유일하신 분이시고 또 하느님과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서 한 분이신 하느님의 아들이시면서도 또한 하느님이시라는 이 두 가지 진리를 명료하게 표현할 방법을 알지 못했다. 

 

4세기경,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아리우스라 하는 사제는 예수님께서 단지 하느님과 유사한 분이실 뿐, 어디까지나 하느님의 피조물이시라며 하느님과 예수님의 ‘유사본질’(ὁμοιούσιος, 호모우시오스)을 주장했다. 이것이 큰 논쟁으로 번져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되었고, 결과적으로 대부분의 주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완전히 동일하신 분, 하느님 그 자체이시라는 ‘동일본질’(ὁμοούσιος, 호모우시오스)을 사도들로부터 이어 온 정통 신앙으로 확인했다.

 

니케아 공의회 이후, 그리스도교는 성부(아버지), 성자(아들), 그리고 성령께서 위격에 있어서는 세 분이시요 본질에 있어서는 한 분이시라는 삼위일체 교의를 정립하였다. 얼핏 보면 굉장히 난해하게 느껴지나 정의 자체는 간단하다. 위격은 ‘그는 누구인가’를 나타내며, 본질은 ‘그는 무엇인가’를 나타낸다. 예컨대, 현 교황이 누구인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라는 세속명을 지닌 레오 14세라고 답한다. 레오 14세가 무엇인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그가 나이 69세의 노인이라고 답한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이 누구시냐 한다면 성부, 성자, 성령이신 것이고, 성부, 성자, 성령이 무엇이냐 한다면 하느님이신 것이다.

 

이토록 간단한 정의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의 머리로는 본질이 하나인데 위격이 여럿인 존재를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한이라는 개념의 정의를 쉽게 이해할 수 있지만, 무한 개의 사과를 상상해 보라고 하면 결코 완벽히 상상할 수 없는 것과 같다. 하지만, 우리는 누군가 무한에 대해서 얘기할 때 “오, 그 단어는 너무 어려워서 결코 이해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삼위일체에 대해서도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교회는 이 삼위일체를 상징적으로, 또 예술적으로 표현하여 신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애썼다. 삼위일체를 묘사한 가장 오래된 성미술 작품은 니케아 공의회가 소집된 지 반 세기도 되지 않은 4세기 중반, 로마에서 제작된 ‘교의 석관’(Dogmatic Sarcophagus)이다. 이 석관은 한 귀족 부부를 안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써, 가운데 커다랗게 새겨진 부부의 모습 주변으로 성경의 다양한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맨 좌측 상단에 묘사된 것은 하느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는 장면으로서, 여기서 하느님은 똑같이 생긴 세 명의 남성들로 표현되었다.

「교의 석관」(Dogmatic Sarcophagus), 약 325-350년경, 바티칸 피오 크리스티아노 박물관. (사진 : Sailko, 사용 라이선스 :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3.0/)
교의 석관에 묘사된 삼위일체 하느님.

 

 

아브라함의 환대

 

비슷한 시기, 그리스도교 성미술은 삼위일체를 표현하는 데 마므레 참나무 곁에서 아브라함을 방문했던 세 사람의 이미지를 활용했다. 창세기 18장은 세 명의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와 식사를 대접받고, 그의 늙은 아내 사라가 아이를 배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전했음을 기록한다. 성경은 이 세 사람의 방문을 두고 주님께서 나타나신 것이라고 말한다.

 

주님께서는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에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 아브라함은 한창 더운 대낮에 천막 어귀에 앉아 있었다. 그가 눈을 들어 보니 자기 앞에 세 사람이 서 있었다.

그는 그들을 보자 천막 어귀에서 달려 나가 그들을 맞으면서 땅에 엎드려 말하였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제가 빵도 조금 가져오겠습니다. 이렇게 이 종의 곁을 지나게 되셨으니, 원기를 돋우신 다음에 길을 떠나십시오.” 그들이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 아브라함은 급히 천막으로 들어가 사라에게 말하였다. “빨리 고운 밀가루 세 스아를 가져다 반죽하여 빵을 구우시오.” 그러고서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그들이 아브라함에게 “댁의 부인 사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 그가 “천막에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분께서 말씀하셨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는 아브라함의 등 뒤 천막 어귀에서 이 말을 듣고 있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이미 나이 많은 노인들로서, 사라는 여인들에게 있는 일조차 그쳐 있었다. 그래서 사라는 속으로 웃으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늙어 버린 나에게 무슨 육정이 일어나랴? 내 주인도 이미 늙은 몸인데.’ 그러자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사라는 웃으면서, ‘내가 이미 늙었는데, 정말로 아이를 낳을 수 있으랴?’ 너무 어려워 주님이 못 할 일이라도 있다는 말이냐? 내가 내년 이맘때에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사라가 두려운 나머지 “저는 웃지 않았습니다.” 하면서 부인하자, 그분께서 “아니다. 너는 웃었다.” 하고 말씀하셨다. (창세 18,1-15)

 

전통적으로 이 세 사람은 천사로 여겨졌으며, 삼위일체 하느님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4세기의 성 암브로시오는 이 대목을 두고 일치된 세 사람의 현현이 곧 삼위일체를 드러낸다고 해설했다.

 

나그네들을 반가이 맞고, 하느님께 충실하며 그 섬김에 지칠 줄 모르고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데 기민한 아브라함은 삼위일체의 예형을 보았습니다. 그는 환대만 한 것이 아니라 깊은 신심까지 보여 주었습니다. 세 사람을 보았지만 한 분께만 경배했으며, 셋을 구별하면서도 한 분만 주님으로 부름으로써 세 사람을 높이면서도 하나의 권능만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지식이 아니라 은총이 그의 안에서 이야기했던 것입니다. 그는 그가 배우지 않은 것을 배운 우리보다 더 제대로 믿었습니다. 진리의 예형을 조금도 왜곡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세 사람을 보았지만 그들의 일치를 경배했습니다. 그는 빵은 세 분량을 내왔지만 제사는 한 번이면 족하다 믿었기에 송아지는 한 마리만 잡았습니다. 희생 제물은 하나지만 예물은 셋이었습니다.[각주:2]

 

이러한 상징적 중요성 때문에, 마므레의 세 사람에 대한 아브라함의 환대 장면은 성미술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었다.

 

이탈리아 로마 산타마리아 마조레 대성전, 5세기.
이탈리아 라벤나 산 비탈레 성당, 6세기.
이탈리아 시칠리아 몬레알레 대성당, 1180년대.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15세기 러시아 정교회의 안드레이 루블료프가 제작한 「삼위일체」(Троица)이다. 여기서는 더 이상 ‘아브라함의 환대’로서의 서사적 묘사가 없고 세 천사만이 묘사되어 있으며, 이 세 천사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상징적 요소들로 풍부하다. 세 천사는 모두 하느님의 본성을 상징하는 푸른색 옷을 입고 있다. 좌측의 천사는 왕권과 위엄을 상징하는 금색 옷을 입고 있으며 성부를 나타낸다. 가운데 천사는 사람의 본성을 상징하는 붉은색 옷을 입고 있으며 성자를 나타낸다. 우측의 천사는 생명을 상징하는 녹색 옷을 입고 있으며 성령을 상징한다.

 

성자와 성령을 나타내는 두 천사는 성부를 나타내는 천사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이는 성부께서 성자와 성령의 기원이심을 나타낸다. 동시에 세 천사 모두 대등한 자리에 좌정하고 있음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본성과 위엄에 있어서 동등한 분이심을 뜻한다. 세 천사 가운데 식탁 위에 올려져 있는 금잔에는 송아지가 담겨 있는데, 이는 세상을 위한 성자 그리스도의 희생을 드러낸다. 성자를 나타내는 천사는 그 잔을 가장 가까이에서 강복하고 있다.

 

안드레이 루블료프, 「삼위일체」(Троица), 약 1411년경, 러시아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세 명의 남성

 

한편 안드레이 루블료프보다 더 이른 시기, 서구 교회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세 천사의 이미지를 넘어, 동일하게 생긴 세 명의 남성으로 삼위일체를 직접 묘사하곤 했다. 이러한 표현 양식은 마므레의 세 천사 이미지에 영향을 받은 것이 확실해 보인다. 여기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모습은 모두 사람이 되신 성자 예수님의 전통적인 이미지로 통일되어 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요한 14,9)라든지, “그분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이시며”(콜로 1,15) 등의 말씀들 때문에 성자의 모습이 곧 성부와 성령의 모습이리라 생각했기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물론 어디까지나 예술적 허용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삼위일체 로마 미사 경본」(Triandrique Missel romain), 1362년, 프랑스 툴루즈.

 

한편 세 천사를 환대하는 아브라함과 함께 삼위일체가 묘사되는 경우도 있다.

 

실베스트로 데이 게라르두치, 「그라두알레」(Graduale), 약 1392-1399년경, 이탈리아 피렌체, 現 미국 뉴욕 피어몬트 모건 라이브러리.
장 푸케, 「에티엔 슈발리에의 성무일도」(Hours of Etienne Chevalier), 약 1450년경, 프랑스 샹티이 콩데 미술관.
「스피놀라 성무일도」(Spinola Hours), 약 1510-1520년경, 벨기에, 現 J. 폴 게티 미술관.

 

 

은총의 어좌

 

비슷한 시기에 삼위일체를 묘사하는 데 있어서 이보다 더 빈번하게 활용된 이미지는 “은총의 어좌”(Throne of Grace)라고 불리는 표현 양식이다. 은총의 어좌는 성부께서 어좌에 앉으신 채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성자를 붙들고 계신 모습을 나타낸다. 성령은 비둘기 형상으로 그려지지만 때때로 생략되기도 한다.

 

「기유이 드 부아슬뢰의 시편집 성무일도」(Psalter-Hours of Guiluys de Boisleux), 1246년 이후, 프랑스 아라스, 現 미국 뉴욕 피어몬트 모건 라이브러리.
시편집, 프랑스 생토메르 추정, 13세기, 現 미국 뉴욕 피어몬트 모건 라이브러리.
기욤 르 클레르, 「하느님의 베스티아리」(Bestiaire divin), 영국, 약 1250-1275년경, 現 프랑스 국립도서관.
「에거튼 시편집」(Egerton Psalter), 약 1270-1290년경, 대영 도서관.
「은총의 어좌」(Throne of Grace), 약 1300-1310년경, 독일 프리츨라어 성 베드로 대성당.
자코포 디 치오네, 이탈리아 피렌체 산피에르 마조레 성당 제단화, 약 1370-1371년경, 영국 국립 미술관. (사진 : Sailko, 사용 라이선스 : https://creativecommons.org/licenses/by/3.0/deed.en)

 

 

위의 그림들을 보면 역시나 성부가 성자와 똑같은 모습, 즉 사람이 되신 예수님의 모습을 아버지 하느님 역시 취하고 있다. (심지어 기욤 르 클레르의 작품에는 성부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오상을 지니고 계신데, 이는 성부수난설의 오류를 반영할 수 있는 부적절한 묘사이다.) 

 

한 세기 정도 지나면 성부를 성자와 다른 모습으로 묘사하는 작품들이 나타나게 된다. 주로 성부는 왕관을 쓰거나 독보적인 품위를 지닌 백발의 노인으로 묘사된다. 이로써 삼위일체 성미술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각각의 독특한 이미지를 취하게 된다.

약 1431년경, 벨기에 브뤼셀 성모 성당의 삼위일체 경당.
약 1446-1455년경, 독일 아이슬레벤 성 안드레아 성당.
로랭 지라르댕, 「삼위일체」(The Trinity), 1460년, 프랑스, 現 미국 클리블랜드 미술관.
타데오 크리벨리, 약 1460–1470년경, 이탈리아 페라라, 現 미국 로스엔젤레스 J. 폴 게티 미술관.
산드로 보티첼리, 「회심한 자들의 제단화」(Pala delle Convertite), 약 1491-1493년경, 영국 런던 코톨드 갤러리.
알브레히트 뒤러, 「삼위일체 경배」(Adoration of the Trinity), 약 1509–1511년경,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하느님의 고통

 

은총의 어좌에는 독특한 바리에이션이 있는데, 십자가에서 내리워진 성자의 시신을 안고 계신 성부의 감정이 역동적으로 드러나는 이미지들이 많다. 이 경우에는 ‘하느님의 고통’(Not Gottes)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느님의 고통」(Not Gottes), 약 1420-1430년경, 오스트리아 빈 미술사 박물관.
콜레인 더 코터, 약 1510-1515년경, 벨기에, 現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페데리코 주카리, 약 1563년경, 이탈리아 로마 트리니타 데이 몬티 성당의 푸치 경당.
엘 그레코, 「성 삼위일체」(La Santísima Trinidad), 약 1577-1579년경,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루도비코 카라치, 「돌아가신 그리스도와 삼위일체」(The Trinity with the Dead Christ), 약 1590년경, 바티칸 피나코테카 회화관.
호세 데 리베라, 「삼위일체」(La Trinidad), 1635년, 스페인 마드리드 프라도 국립미술관.

 

 

우리를 향한 삼위일체의 사랑과 자비에 힘입어

 

(반드시 시간 순으로 귀결되지는 않는) 이러한 도상학의 다양하고 복잡한 흐름에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교회 성미술 안에서 서로 뚜렷하게 구별되는 상징성을 갖게 된 것이다. 성부는 위엄 있는 백발의 노인으로 묘사됨으로써 그분이 아버지이심이 드러난다. 그 오른편에 앉으신 성자는 우리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시어 수난하심으로 얻은 상처를 드러내 보이신다. 성령은 삼위일체가 온전히 드러났던 예수님의 세례 때 비둘기의 형상으로 나타나신 것(마태 3,16-17 참조) 그대로 성부와 성자 사이에 나타나시는데, 이로써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의 역할이 드러나게 된다.

 

「베아투스 비르 시편집」(Beatus vir Psalter), 약 1510년경, 프랑스, 現 미국 오리건 리드 칼리지 도서관.
헨드릭 반 발렌, 「성 삼위일체」(Holy Trinity), 1620년대, 벨기에 안트베르펜 성 야고보 성당.
피에트로 노벨리, 「삼위일체」(Trinità), 17세기, 헝가리 부다페스트 미술관.

 

삼위일체를 서로 완전히 동일한 모습의 세 사람으로 묘사하는 것은 우리에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 본성과 위엄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신 한 분의 하느님이심을 드러낸다. 교회는 여기서 더 나아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서로 다르게, 또 독특하게 묘사하기 시작하면서 성부, 성자, 성령이 한 분 하느님이심에도 서로 관계를 이루시고, 또 이 세 분께서 각자 우리와 독특한 관계를 갖는 분이심을 우리로 하여금 일깨우게 되었다. 

 

많은 신자들이 삼위일체를 두고서 ‘본성으로는 한 분이신데 어찌 위격으로는 세 분이신가’라는 이해할 수 없는 신비를 두고 끊임없이 씨름한다. 하지만 삼위일체의 신학적 정의에만 몰두한 나머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 각각 어떤 분이시고, 성부는 어떻게, 성자는 어떻게, 성령은 어떻게 우리와 관계를 가지시는지를 놓쳐서는 안 된다. 어버이날이 되어 부모님께 무언가를 해드리고자 하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어떤 성품을 가진 분이시고 또 나에게 어떤 말씀과 행동을 하셨으며 무엇을 해드려야 좋아하실지는 제쳐두고서 부모님의 키는 몇이시고 몸무게는 몇이시고 얼굴에 주름이 얼마나 있으시고 하는 것들에만 몰두한다면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미사의 고유 기도와 성경 독서 내용을 살펴봐도, 삼위일체에 대한 본격적인 정의는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시옵니다”라 고백하는 감사송에서만 드러난다. 대부분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각각 어떠한 역할로 우리를 구원하시는지를 드러낸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진리의 말씀이신 성자와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을 세상에 보내시어 하느님의 놀라우신 신비를 인간에게 밝혀 주신다”(본기도).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가 서 있는 이 은총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었고 ……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제2독서).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아들이신 예수님의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예수님의 것을 받아 우리에게 알려 주신다(복음). 성자로 말미암아 우리는 성부와 화해하였고, 성령께서 우리 마음에 임하시어 비로소 성부께 “아빠! 아버지!”라고 외칠 수 있게 되는 것이다(영성체송).

 

성부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성자를 붙들고 계신 모습을 우리는 은총의 어좌라 부른다. 이는 히브리인들에게 보낸 서한의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히브 4,12-16)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다 꿰뚫어 보시며, 우리는 그 어떤 것도 그분 앞에 감출 수 없다. 큰 죄는 물론이요 우리 안에 있는 제아무리 사소한 악이라 할지라도 다 그분 앞에 드러나 심판 때에 해명해야 하니, 이보다 두려운 일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하느님은 우리의 연약함, 금세 하느님의 말씀을 저버리고 쉽게 유혹에 빠져드는 우리의 인간의 연약함을 모르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아시고 또 동정하시고 연민하신다. 그것도 모자라, 성부께서는 당신의 소중한 아드님을 우리에게 내어 주시어, 모든 유혹과 죽음의 고통을 몸소 겪게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이제 우리 인간의 처지를 다 내다 보고 아실뿐만 아니라, 직접 경험하기까지 하셨다.

 

아들을 내어 주신 성부의 사랑,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어 주신 성자의 사랑, 그 모든 사랑을 성령께서 우리에게 임하시어 온전히 부어 채워 주신다. 

 

「은총의 어좌의 성 삼위일체」(Die Heilige Dreifaltigkeit als Gnadenstuhl), 약 1460년경, 독일 베를린 국립 회화관.

 

은총의 어좌 가운데서 돌아가신 아드님을 품에 안고 계신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단순히 아들의 고통과 죽음 때문에 가슴 아파하시는 것이 아니다. 아들을 죽게 한 우리를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계시는 것도 아니다. 은총의 어좌에서 우리를 향하는 성부의 눈빛은, 아드님께서 죄 없이 감당하신 유혹과 고통, 그리고 죽음을 마찬가지로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와는 달리 죄로 인하여 하느님과 단절되어 더 큰 아픔 가운데 신음하는 우리 인류를 향한 진심 어린 동정, 연민, 우리 모두를 불쌍히 여기시는 무한한 자비의 눈빛이다. 그분은 외아들의 고통뿐만 아니라, 성령을 보내시어 아들 딸로 삼으신 우리 모두의 고통을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가지고 바라보신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오로지 그 사랑과 자비에 응답하는 것뿐이리라.

  1. 그리스어로 보면, 필리피서 2장 10-11절의 내용, 즉 “예수님의 이름 앞에 모든 무릎이 꿇리우고 …… 모든 혀가 고백하며”(ἐν τῷ ὀνόματι Ἰησοῦ πᾶν γόνυ κάμψῃ …… καὶ πᾶσα γλῶσσα ἐξομολογήσηται)라는 대목은 이사야 예언서 45장 23절에서 하느님께서 “정녕 모두 나에게 무릎을 꿇고 입으로 맹세하며”(κάμψει πᾶν γόνυ καὶ ἐξομολογήσεται πᾶσα γλῶσσα)라고 하신 말씀과 완전히 동일하다. [본문으로]
  2. 성 암브로시오, 「동생 사티루스의 죽음」(On the Death of Satyrus), 2, 96.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