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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영성

삼위일체는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에의 초대이다

미겔 카브레라, 「삼위일체」(The Holy Trinity), 투손 미술관 소장, 1757년, 퍼블릭 도메인.

그리스도의 부활을 경축하고 매일 같이 “하늘의 모후님, 기뻐하소서! 알렐루야”를 노래하던 부활 시기도 지난 성령 강림 대축일을 끝으로 어느새 저물었다. 이제 교회는 연중 시기에 접어들었고, 사제는 미사 때 녹색 제의를 입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가오는 주일, 즉 성령 강림 대축일 이후 첫 주일을 우리는 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로 기념하게 될 것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최초의 세계 공의회인 325년 제1차 니케아 공의회에서 확립된 교리다. 당시 공의회가 소집된 계기는 성자 예수 그리스도가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 이단의 발흥이었다. 그리스도교는 처음부터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 성령께서도 하느님이심을 굳게 믿어 왔고, 그것을 교리로 정리한 것이 바로 삼위일체 교리이다.

 

아주 이른 시기부터 교회 전체의 합의로써 정통 신앙으로 선포된 그 위상에 비하면, 보편 교회가 축일로 삼위일체를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비교적 상당히 늦은 일이었다. 일부 지역 교회에서는 이미 삼위일체 축일을 기념하기 시작했고 또 11세기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게 삼위일체 축일을 마련해 달라는 청원이 올라갔던 적도 있으나, 알렉산데르 2세는 이미 신자들이 매일 같이 영광송을 바치며 삼위일체를 기념하고 있으므로 축일까지는 불필요하다 하여 거절했다. 보편 교회가 최초로 삼위일체 축일을 기념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 교황 요한 22세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에게 있어서 삼위일체 신앙은 일상에서 가장 빈번히 고백하는 신앙이다. 우리는 기도를 시작할 때마다 성호경, 즉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이라는 고백으로 시작하고, 영광송, 즉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아멘”이라는 찬미로 끝맺는다. 우리의 기도는 대부분 삼위일체 고백으로 시작해서 삼위일체 찬미로 끝난다.

 

 

이해할 수 없는 신비?

 

이토록 신자들에게 가장 일상적인 신앙 고백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신자들은 삼위일체를 두고 아리송해 하기만 한다. 말인즉슨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지만 동시에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이시라는 것이니, ‘어떻게 한 분이시면서 세 분이실 수 있나’ 하고 갸우뚱하게 되는 것이다. 매년 삼위일체 대축일만 되면 사제들은 앞다투어 “삼위일체는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다”라고 말하기 바쁘다. 그나마 교리를 좀 잘 아는 신자들이 삼위일체에 대해서 얘기한다 하면 “성부≠성자≠성령이지만 성부=하느님, 성자=하느님, 성령=하느님이다”라는 식의 유사 수학 공식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리고 누가 삼위일체에 대해서 비유를 좀 한다 하면, ‘그렇게 비유하면 이단에 빠질 수 있으니 그냥 믿어라’라고 일갈하는 경우까지 있다.

 

이러한 현실만 짚어 본다면, 도대체 삼위일체라는 것이 무엇인지 싶어진다. 그러니까 삼위일체란, 어차피 이해할 수도 없고, 설명을 하자면 수학 공식을 늘어놓게 되고, 이해를 돕고자 무언가에 비유해서도 안 되고 그냥 그 공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니,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삼위일체가 이해하기 어려운 신비라는 데 있어서 자주 인용되는 것은 성 아우구스티노의 바닷가 일화이다. 1275년 복자 야고보 데 보라지네는 「황금 전설」(Golden Legend) 제28장에서 다음과 같이 전한다.

 

앞서 말했듯이 이 영광스러운 학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많은 책을 집필하고 편찬했는데, 그 중에서도 그는 삼위일체에 관한 책을 썼다. 그는 삼위일체에 대해 몹시 연구하고 사색했으니, 아프리카의 바닷가를 걸으면서도 삼위일체를 두고 연구하고 있었다. 그는 바닷가에서 모래에 작은 구덩이를 파고, 손에 든 작은 숟가락으로 넓은 바다에서 물을 퍼 구덩이에 붓고 있는 작은 어린아이를 보았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그 아이를 보고 놀라며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다. 아이는 대답했다. “저는 이 바다의 모든 물을 퍼다가 이 구덩이에 담을 거예요.”

성 아우구스티노가 말했다. “뭐라고? 그것은 불가능하단다. 바다가 이렇게 크고 넓은데 네 구덩이와 숟가락은 그토록 작거늘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겠느냐?”

그러자 아이는 말했다. “과연 그렇습니다. 제가 이 바다의 모든 물을 가져다 이 구덩이에 담는 것이, 그대가 이해하려 하는 것에 관해서 말하자면, 삼위일체의 신비와 그분의 신성을 그대의 작은 이해에 담는 것보다 쉽고 빠를 것입니다. 이는 저 거대한 바다가 이 작은 구덩이에 비해서 큰 것보다, 그대의 지혜와 두뇌에 비교했을 때의 삼위일체의 신비가 더 위대하고 거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이는 사라졌다. 여기서 모든 사람이 본보기를 삼을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특히 글을 조금밖에 모르거나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은, 하느님 본성에 관한 드높은 것들을 감히 사색하려 들어서는 안 되며, 우리가 신앙으로 알게 된 것 이상으로 더 나아가려 해서도 안 된다. 오로지 신앙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파블로 베르고스, 「어린 예수께서 나타나셨을 때 삼위일체에 대하여 묵상하는 성 아우구스티노」(Saint Augustine Meditates on the Trinity when the Child Jesus Appears before him), 카탈루냐 미술관 소장, 약 1470년경 또는 1475-1486년경, 퍼블릭 도메인.

 

아름다운 이야기다. 어떤 사람은 성 아우구스티노 앞에 나타난 아이가 천사였다고도 하고, 파블로 베르고스의 성화처럼 예수님이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좌우지간 확실한 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를 우리 인간의 이해에 다 담아내려는 것은 작은 모래 구덩이에 광활한 바다의 모든 물을 다 담아 옮기려는 것만큼이나 불가능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성 아우구스티노는 삼위일체에 대해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게끔 『삼위일체론』(De Trinitate)이라는 방대한 저서를 집필하였다. 삼위일체가 신비라는 것은 우리가 삼위일체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지, 아예 이해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컨대 우리의 유한한 머리로는 무한하신 하느님을 완전히 떠올릴 수 없지만, 무한이라는 게 무엇인지 조차 아예 떠올릴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체와 성혈이 빵과 포도주의 형상을 유지한 채로 어떻게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한 것인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지만, 최소한 성체와 성혈이 그리스도의 실제 몸과 피라는 것조차 아예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삼위일체에 대해서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고, 묵상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아무리 퍼다 나르더라도 완전히 다 담아낼 수 없는 광활한 바다의 물과도 같은 것이지, 아예 퍼다 나를 것이 없는 매마른 사막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홀로는 아니시다

 

그렇다면 삼위일체를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까? 4세기 교황 성 다마소 1세의 신앙 고백에 따르면, “하느님께서는 한 분이시지만 홀로는 아니시다.”[각주:1]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 세 분의 관계가 있다.

 

15세기 피렌체 공의회의 교령들 가운데 하나인 「주님께 노래하여라」(Cantate Domino)는 삼위일체에 대해 이렇게 고백한다.

 

이 세 분의 위격은 세 분의 하느님들이 아니라 한 분 하느님이시다. 왜냐하면 세 분께 하나의 실체, 하나의 본질, 하나의 본성, 하나의 신성, 하나의 위엄, 하나의 영원성이 있으며, 관계의 대립이 없다면 모든 것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일성으로, 성부는 온전히 성자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령 안에 계시며, 성자는 온전히 성부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령 안에 계시며, 성령은 온전히 성부 안에 계시고 또 온전히 성자 안에 계신다.

 

따라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 세 분의 관계 사이에는 어떠한 대립도 없기 때문에 진정 한 분이 되시는 것이다. 사람 사이에서는 제 아무리 긴밀하고 친밀한 사이라 할지라도 관계의 대립이 아예 없을 수는 없다. 하지만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온전히 서로의 안에 계심으로써 완전한 단일성을 이루신다.

 

그렇담 성부, 성자, 성령의 관계라는 것은 무엇일까. 니케아 콘스탄티노폴리스 신경은 “한 분이신 하느님 …… 전능하신 아버지, 하늘과 땅과 유형무형한 만물의 창조주”를 고백한다. 그리고 “또한 한 분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 하느님의 외아들, 영원으로부터 성부에게서 나신 분”을 고백한다. “영원으로부터”(ante omnia saecula)는 직역하면 “모든 시대에 앞서”라는 뜻으로서, 세상 만물뿐 아니라 아예 시간이 창조되기도 전을 뜻한다. 하느님께서는 그분 안에서 아들(성자)을 낳으시고, 아들에 대해서 아버지(성부)가 되신다. 니케아 신경은 성자를 “하느님에게서 나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한다. 그리고 니케아 신경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시는” 성령을 고백한다. 

 

 

하느님은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이시다

 

이와 같은 설명은 신학적으로는 정확하지만, 와닿는 설명은 아니다. 대신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라는 진리에 입각하여 삼위일체를 ‘사랑’으로 풀어낸다.

 

하지만 사랑에 이르러서는, 성경에서 사랑이 곧 하느님이라고 하므로, 어느 정도 삼위일체가 밝히 드러났다. 곧, 사랑하는 이, 사랑받는 이, 그리고 사랑 자체가 드러났다. ……  또 하느님에게서 비롯하여 인간에게 유래하는 지혜를 우리가 논하는 마당에서 …… 그러니 거기에는 삼위일체가 분명 있으니 곧 지혜와, 지혜의 자기 인식과, 지혜의 자기 사랑이 그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에게서도 삼위일체를 발견할 수 있으니 다시 말하자면 지성과, 지성이 자체를 아는 인식과, 지성이 자체를 사랑하는 사랑이 그것이다.[각주:2]

 

나는 한 명의 사람이지만, 나 자신이 있고, 내가 떠올리는 나 자신이 있고, 내가 나를 사랑하는 사랑이 있으며 이 모든 것 역시 나 자신이듯이, 하느님께서도 한 분이시지만 사랑하시는 하느님, 사랑받으시는 하느님, 사랑이신 하느님이 계신다.

 

이 진리에 입각해서 좀 더 이해하기 쉽게 이야기를 풀어보자. 하느님께서는 시간이 있기도 전에 아들을 낳으신다.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느님께서는 아들에게 자신의 신성, 즉 하느님으로서의 본질을 온전히 내어 주신다. “하느님은 그분의 본질 및 본성과 동일하시다.”[각주:3] 따라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것이다. 하느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사랑 그 자체이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이 사랑을 성령이라 부른다.

 

하느님은 사랑 그 자체, 나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사랑의 관계 그 자체이시다. 이 사랑의 관계에는 사랑하시는 아버지, 사랑받으시는 아들, 사랑이신 성령이 계신다. 

 

그리고 이 사랑의 관계에 인류가 초대된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모든 것을 내어 주는 사랑의 관계에 피조물인 인간을 초대하신다. 우리는 이 초대를 ‘파스카’라고 부른다. 파스카라는 이름의 초대가 이루어진 곳은 십자가였다. 성자께서는 죄로 인하여 하느님과 갈라선 인류를 다시금 하느님과 화해토록 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그분 자신의 전체, 모든 것을 성부께 오롯이 내어 드렸다. 자신의 몸과 피, 영혼, 그리고 신성까지도 내어 드렸다. 성자께서는 자신이 성부로부터 받으신 모든 것을 십자가에서 고스란히 돌려 드린다.

 

이는 하느님의 사랑, 하느님의 자기 내어줌이 이 시공간 안에서 구현된 것이 곧 ‘희생’(sacrificium)임을 보여준 것이다. 종교적인 의미에서 ‘제사’라고도 번역되는 이 희생이란 본디 고대로부터 인류가 신과 관계 맺고자 짐승이나 자신이 가진 것 따위를 봉헌하며 거행해 온 것이었다. 성자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이 구조는 역전된다. 이제 희생은 인간이 신에게 바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신이 자기 스스로를 바치는 것이 되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팔리시던 그 밤에 최후 만찬에서 당신 몸과 피의 성찬의 희생 제사를 제정하셨다. 이는 다시 오실 때까지 십자가의 희생 제사를 세세에 영속화하시려는”[각주:4] 것이었다. “세세에 영속화한다”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이 그 옛날 한 때 저 어딘가에선가 있었던 과거의 사건으로 끝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성찬의 희생 제사, 즉 미사를 제정하심으로써, 미사가 거행되는 모든 곳에서 그분의 희생이 세상 끝날까지 계속해서 성부께 드려지게 하셨다.

 

이 성찬의 희생 제사를 통해 그리스도께서는 성부께 내어 주셨던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도 영성체를 통해 내어 주신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기 내어줌에 우리 모두를 초대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삼위일체를 계시해 주신 것은, 아무런 이해도 할 수 없는 난해한 명제를 무작정 믿으라고 강요하심으로써 우리가 무슨 뚱딴지같은 말을 듣더라도 받아들일 수 있을지 시험하려고 계시하신 것이 아니다. 하느님께서는 천국에 천사가 몇 명이나 있는지, 지옥에는 누가 떨어졌는지 같은 것들을 알려주지 않으신다.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신이 삼위일체이심을 알려 주셨다. 이는 그것이 우리와 상관이 있기 때문이다.

 

 

삼위일체는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에의 초대이다

 

오늘날 우리는 삼위일체 신앙, 즉 자기 자신을 온전히 다 내어 주시는 사랑을 고백하면서도, 매 미사 때마다 그 사랑에 초대받으며 성체를 영하면서도, 자기 자신을 내어 주기는커녕 꽁꽁 싸매기 바쁘다. 교회 밖에서야 말할 것도 없다. 남이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상하게 하면 바로 기싸움을 하거나 다투기 일쑤다. 친구나 직장 동료는 물론이고 가족 간이라도 예외가 없다. 교회 안에서조차 그렇다. 사목회장으로서, 구역장으로서, 청년회장으로서, 전례단장이나 성가단장, 그 외 무슨 임원단으로서 누군가가 내 위신에 흠집이라도 낸다면 ‘나 자신’이 침해되었다는 생각에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신경질이 몰려오는 신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새 본당 청년회에 발을 들였다가 환대를 받기는커녕 자기들끼리 친목을 나누느라 공동체에 제대로 어울리지 못한다고 하소연하는 청년 신자들이 상당히 많다. 이 공동체 가운데 낯선 외부인이 감히 끼어드는 것은 ‘우리’가 침해되는 것이라는 생각일 터이다. 매일 같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영광을 드리면서도, 타자를 배제하면서 ‘나’를, ‘우리’를 지키려 애쓰는 교우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 ‘나’를, ‘우리’를 기꺼이 허무셨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에게 모든 것을 내어 주시고, 아들도 아버지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며 언제나 성령으로 하나 되신다. 그리고 그 위대한 사랑에 아버지께서는 죄 많은 우리에게 아들의 모든 것을 기꺼이 내어 주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사랑 앞에 “하지만…”이라고 운을 떼며 변명이나 자기 합리화를 하고 싶어 지거든, 중세 서구 교회가 삼위일체를 묘사하는 여러 성미술 양식 가운데 ‘하느님의 고통’(Not Gottes)이라는 이름으로 분류되는 성화상들을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품에 안아 슬퍼하는 동정 성모의 모습, 이른바 ‘피에타’에는 익숙한 우리에게 이 성화상들은 다소 낯설게 다가올지 모른다. ‘하느님의 고통’은,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슬퍼하시는 천주 성부를 우리에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작가 미상, 「하느님의 고통」(Not Gottes),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약 1420-1430년경, 퍼블릭 도메인.
작가 미상, 「은총의 어좌의 성 삼위일체」(Die Heilige Dreifaltigkeit als Gnadenstuhl), 베를린 국립 회화관 소장, 약 1460년경, 퍼블릭 도메인.
엘 그레코, 「성 삼위일체」(La Santísima Trinidad), 프라도 미술관 소장, 약 1577-1579년경, 퍼블릭 도메인.
페테르 파울 루벤스, 「하느님의 고통」(Not Gottes), 안트베르펜 왕립미술관 소장, 약 1620년경, 퍼블릭 도메인.

 

사람이 그토록 내려놓기 힘들어하는 ‘나’를, ‘우리’를,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위하여 기꺼이 내어 주셨다. 우리는 이 사랑을 결코 가벼이 여길 수 없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줄 정도로 사랑하시는 아드님을 또한 우리에게 내어 주신 하느님의 그 고통이 서린 사랑 앞에서 우리는 어떠한 변명도, 자기 합리화도 할 수 없다.

 

우리가 날마다 삼위일체를 고백하고 또 삼위일체를 찬미하는 것은, 우리 또한 삼위일체의 사랑에 기꺼이 헌신하겠다는 다짐으로 이어져야 한다. 우리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을 고백할 때, 우리는 십자가 위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난 하느님의 자기 내어줌을 상기해야 하는 것이다.

 

삼위일체는 우리 이해로부터 완전히 동떨어진 공염불도 아니요, 무미건조한 수학 공식도 아니요, 그럴싸한 현학 놀음을 위한 투닥거리도 아니다.

 

삼위일체는 가장 위대한 사랑, ‘나’와 ‘우리’를 ‘너’를 위해 허무는 사랑에의 초대이다. 


 

  1. 「가톨릭교회 교리서」, 254항. [본문으로]
  2. 성 아우구스티노, 『삼위일체론』(De Trinitate), 15, 6, 10. [본문으로]
  3. 성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Summa Theologiae), I, q. 3, a. 3. [본문으로]
  4.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 47항. [본문으로]